‘과학기술 르네상스’, “대통령 곁 과학 잘 아는 브레인 많아야”
“고속도로와 지하철, 척 보면 어떻게 갈아탈지 알 수 있게 해야”
장호남(79) 전 카이스트 학장은 생명화학공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스스로 밤을 새며 연구하기엔 연로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이나 연구 업적 중 상용화가 가능한 게 많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그가 창안해낸 획기적인 ‘해수 담수화’ 방안이다. 담수화는 원래 미국 토목공학계에서 토목 관련 연구에서 출발했다. 아직 토목공학계의 말빨이 드세 화공학 이론을 통한 획기적 방안을 만들어냈으나 업계에서 잘 이해를 못한단다. 장호남 학장의 해수 담수화 방안이 사업화를 이루지 못하는 곡절이다.
그는 지금 카이스트 명예교수로 있다. 20일 장호남 교수가 ‘과학기술의 르네상스’라는 주제로 북악포럼에서 특강을 했다. 과학기술에 무지한 필자도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윤경병 서강대 로욜라석좌교수는 카이스트에서 석사를 마쳤다. 그때 석학 장호남 교수의 명강의를 듣고 감동받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 역시 수소분야에서 획기적 연구 업적을 내, 앞으로 세계 화학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기린아다.
장호남은 사병으로 군대를 마친 뒤, 스탠퍼드대에서 1975년 박사를 땄다. 카이스트에서 최연소 교무처장과 학장을 지낸 바 있다. 한국산업기술연구회와 한국생명공학회 이사장, 회장을 역임했다.
석학 장호남은 <포천>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을 화두로 운을 뗐다. 500개 중 중국 140개, 미국 121개로 절반 넘게 차지한다. 매출 기준이다 보니, 중국이야 기술력도 특정 분야는 뛰어나지만 나라가 커서 그렇다. 한국은 16개로 7위, 우리 바로 위에 영국이 있다. 우리가 곧 영국을 추월할 거라고 장호남은 관측했다.
그는 “한국 기업 포텐셜(잠재력)이 높아, 나라의 앞도 밝은 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카이스트에서 30년 간 인재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AI분야 세계적 석학 카이스트 이상엽 교수가 그가 기른 수제자. 이상엽 이름을 딴 대학원이 카이스트에 만들어졌을 정도다. 과학기술 분야 권위있는 단체장도 맡고, 연구업적도 숱하다.
화려한 성취보다, 일상에서 겪는 시민 불편을 덜어주려는 자세 곧 과학자로서 접근하는 실사구시, 실용주의가 마음에 쏙 든다. 고속도로나 도로, 지하철 노선도가 알아먹기 힘든 난수표다. 그러니 초심자는 암호 해독하듯 끙끙거려야 간신히 어디서 빠져나가고, 어떻게 갈아탈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사이언티스트인 그가 쉬운 해결책을 줘도 채택을 안 한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한마디만 하면 금방 고쳐질 것”이라며 답답해 한다. 2008년 오세훈 시장에게 지하철노선도 개선 방안을 건의한 바 있다. 개선을 한 듯한 데 아직 기대에 못 미치는, 복잡한 난수표 수준이다. 장호남이나 스티브 잡스 같이 천재적 사이언티스트나 엔니지어에겐 공통점이 있다. 늘 시선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 머문다. ‘뭘 불편하게 여기지, 더 편리하게 해낼 방안은?’을 고민하고 답을 구한다.
애플의 스마트폰 역시 전화와 컴퓨터, CD테이프를 합쳐 편리하게 한 거다. 장호남은 카이스트에서 인재를 기르면서 입시제도를 확 고쳐버린 주역이다. 20년 전 쯤에 카이스트 대학원 입시 때 교수가 문제를 잘못 내 난리가 났다. 시험을 무효로 하고, 재시험을 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정규 대학입시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난리가 났을 거다. 대학원 입시라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그 사건을 계기로 카이스트 선발은 서류전형에 면접으로 바꿔버렸다. 사고 소지도 없애고, 지식만으로 뽑는 게 아닌 좋은 선발 방안이기도 했다.
과학이라는 게 별 건가? 근본 이치를 탐구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그럴 실사구시의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참 과학도다. 그는 “과학대통령 효시라 할 박정희 대통령이 KIST를 만들고 출연 연구소를 23개나 만들었다”며 업적을 치하했다.
그는 “박정희처럼, 과학에 관심이 깊은 윤 대통령도 곁에 과학을 이해하는 실사구시형 참모들을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 혼자 1인의 100보를 내달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때로는 3인의 10보, 100인의 1보를 병행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충고다.
그는 H인덱스 등록, 빼어난 논문 371편을 써낸 기록 보유기다. 그러나 이런 게 많다고 노벨상을 받는 건 아니라고 겸손해 한다. “노벨상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엄연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어요. 노벨상을 받을 사람은 소문이 나기 마련이랍니다. 그런 사람이 잘 안보여요…”
필즈상(수학계 노벨상)을 받은 허준이는 한국계지만, 그런 수준의 상을 받았다. 소립자를 발견한 고 벤자민 리(이휘소)가 1968년 돌연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노벨상을 받았을 거란다. 일본은 벌써 2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교토대학이 노벨상 숫자가 도쿄대보다 훨씬 많아요. 달달 외우고 입시 공부만 잘한다고 좋은 거 하나도 없어요.”
장호남의 탁견이다. 문제를 푸는 능력을 키우고, 삶의 질을 높이는 실용적 아이디어를 창출해야 한다는 거다. 앞으로도 노벨상은 기존에 상을 많이 받아, 이론의 축적을 쌓은 곳에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20일 강좌 중 불편한 지하철노선도에 관해선, 답답한 듯 개선방안을 몇번 외고 팼다. 처음 지하철 만든 나라에서 그렇게 하니까, 나머지 나라도 다 묵수적으로 그렇게 불편하게 노선도를 만들었다니… “빨리 바꿔 금방 알아보게 해야 하는데, 중요한 건 정확하게 빨리 갈아탈 수 있어야지. 서울시에서 일을 안 한 건 아니고 비슷하게 만들긴 했지만…” 아직도 성에 안 찬다는 말이다.
오세훈 시장이 장호남 박사를 한번 만나보고 복안을 들어보길 바란다. 그는 고속도로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다시 반복했다. “남북 방향 도로에는 홀수를 씁니다. 동서는 짝수를 쓰고요. 이걸 학교 지리 시간에 좀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이때까지 몰랐거든요.”
고속도로 체계도를 척 보면, 어디로 빠져나갈지를 알게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척 보면 알 수 있게, 바로 판단하게 복잡한 걸 확 간소화하자는 것이 골자다. 그래야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정체나 사고를 줄일 수 있다. 그는 생명화학공학자답게 친환경 에너지를 만드는데 관심이 깊다. 사탕무우 등을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료를 구하기 힘들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이용하자는 거다. 아파트와 같은 집단거주 시설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공동 분쇄해 지하저장고에서 화학처리를 해 에너지도 얻고 환경오염도 방지하는 획기적 아이디어다.
그러나 환경부에서 우리나라의 하수관 인프라가 부실한 것을 들어 법으로 금지시켰다고 한다. 건설교통부는 ‘아파트 짓는 것은 우리 권한인데…’라면서 환경부의 규제에 발끈해 무시를 했다. 그래서 파일럿 프로젝트로 청담동 진흥아파트에 장호남의 아이디어가 테스트 베드로 구현됐단다.
아파트의 음식물 쓰레기를 주부들이 매일 수고스럽게 수거함에 버리는 일을 반복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한심하게 행정을 하는가?” 이 말이다. 주부들이 매일 음식물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수거함에 나르는 수고를 덜어줄 아이디어가 있다면 하수인프라를 정비해서라도 실행해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하수인프라를 개선해 이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술로 아파트를 건설하면 그게 전 세계적 표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아파트 건설의 굉장히 큰 비즈니스가 열릴 수 있다. 좋은 기술 하나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후보 때 보니 반도체, 원전 등 첨단 과학분야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높은 편이다. 산업화의 기수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첨단기술시대의 대통령인 윤 대통령도 과학기술 대통령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 부디 장호남과 같은 원로 과학자들도 만나 ‘과학 보국의 기수’가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