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2주기] 정휴스님 “솔직하고 너그러운 무산당 보고싶다”
“스님은 위로는 국가 지도자로부터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는 좌우에 걸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웠으며 시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하여 현대 한국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9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을 엮은 김병무·홍사성의 말입니다. 2018년 입적하신(음력 4월12일) 조오현 스님 2주기(6월 3일 신흥사에서 다례재)가 돌아옵니다. <아시아엔>은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에 실린 조오현 스님을 回憶하는 글들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정휴 화암사 영은암 암주] 열반은 삶과 죽음에서 벗어난 해탈이 아니라 육신의 소멸이다. 육신의 소멸이 죽음이다. 그리고 소멸을 지나 적멸을 이루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면 난해해지고 다비장에서 본 육신의 소멸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죽음은 영혼의 틀을 바꾸는 일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탄생 이전에도 미치지 못하고 죽음의 이후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는 최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던 두 분을 무생(無生)의 세계로 보냈다. 한 분은 30년 동안 모시고 존경했던 직지사 녹원 큰스님이고 또 한 사람은 50년 동안 절친했던 도반 무산당이다.
녹원 스님은 2017년 12월 직지사 다비장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 속에서 한송이 눈처럼 90년 세월을 소멸시켜 내 곁을 떠났고, 절친한 도반인 무산당은 건봉사 연화장에서 불 속으로 들어가 머리도 꼬리도 없는 신령스러움을 풀어내더니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수행자들은 이렇게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탐구하면서 삶과 죽음을 완성하여 몸과 마음에서 자유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다비장은 언제나 공적(空寂)과 육신의 소멸을 확인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내가 무산당을 처음 만난 곳은 1960년대 초 부산 범어사 강원에서였다. 그는 경(經)을 배우기 위해 범어사 강원을 찾아왔는데 나는 그때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처음 보았다. 첫인상은 땟국물이 빠지지 않은 시골뜨기 같았고, 승복은 그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속인들이 입는 한복 같았다.
그는 천진덩어리였다. 과장과 수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그가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석성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부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때 방부 결정권은 중강(中講)을 맡고 있던 나에게 있었다. 그가 돈오적(頓悟的) 법기(法器)임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던 셈이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내가 부산 대각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는 범어사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옷도 깨끗하고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땟국물이 다 빠져 숨어 있던 비범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안과 밖이 다른 위선을 찾아볼 수 없고, 온유하고 인자하면서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후덕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전일에 있었던 일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소탈한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몇십년을 사귀어온 친구처럼 가까워졌고 서로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가 대각사를 몇 번 왕래하고 난 어느 날 사형(師兄)인 종진 스님이 갑자기 무산당 있는 곳을 한번 찾아가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삼랑진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그가 거처하고 있던 금무산 약수암으로 갔다. 그때가 아마 어둠이 짙게 깔린 초저녁 때였던 것 같다. 된장국과 김치로 허기를 채우고 그의 방으로 갔다가 우리는 놀라운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거처하는 공간은 법당과 함께 사용하는 방이었다. 법당에 들어가 불상을 향해 합장하는데 경악과 웃음이 절로 터지고 말았다. 불상은 전문적인 불모(佛母)가 조각한 것이 아니라 무산당이 손수 조각한 불상이었다. 그 모습이라니!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방안에는 모든 수식이나 장식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한쪽에 문학잡지 <현대문학>이 50여권 쌓여 있었고, 파랑새 담배 한 갑이 천정에서 늘어뜨린 고무줄에 매달려 있었다. 누워서 책을 보다가 고무줄을 잡아당겨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이런 장치를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방안은 넉넉했고 조금도 어색하거나 가난에 쪼들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천진하고 소탈한 품성이 그런 넉넉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약수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온 나는 그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유명한 소설과 시집을 독파하고 반복해서 탐독하고 있었다. 문학적 정진이 날로 깊어져 안으로 눈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를 천착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가 지닌 천부적 문학적 재능과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초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꼬드겼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세상과 교유하기 시작한 것이 김천에서 가까운 계림사였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그는 나를 몹시 원망하고 책망하였다. 약수암에서 자기를 끄집어내지 않았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는데, 나 때문에 꿈이 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계림사로 옮긴 몇 개월 뒤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가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알려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병문안을 가지 못하고 ‘너의 병석을 지킬 사람은 너 자신뿐이고 병도 재산으로 삼으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 뒤로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그동안 우리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몇 군데 강원에서 강사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법보신문>을 창간하고 그 책임을 맡고 있었다. 무산당은 신흥사 성준 스님에게 건당한 후 주지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만행을 하다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바람과 구름처럼 머무는 곳 없이 떠다니는 운수였고 걸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설악산 신흥사는 여러 가지 변고 끝에 문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자기가 잘하지 못해 문도들이 어렵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목표는 설악으로 돌아가 문도들과 산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숨을 몰아쉬며 어려운 부탁을 했다.
“내가 설악산으로 돌아가자면 네가 집행부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구나. 이게 조건이다. 그러니 너는 내 편이 되어주어야겠다.” 종단의 최고책임자가 나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모든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너같은 도반은 다음 생에서도 만나기 어려우니까.”
“고맙다. 우리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다.”
순간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굳어졌다.
“정말 미안하다. 내 욕심 때문에 너를 의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그는 이렇듯 언제나 솔직하고 너그럽고 한없이 자기를 낮추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이익 때문에 얼굴을 돌리고 마는 이웃들에게서조차 미완의 여래(如來)를 읽어내던 ‘중’이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에서 절대적 가치를 찾아내던 무산당,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