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갑자 ‘아나운서 외길’ 김동건···”그의 100살 방송 진행을 보고 싶다”
15년 현장 더 지켜, 100수까지 노련한 진행하시길
현대사 고비마다 마이크 잡고 웃음과 눈물 선사
조선일보의 ‘아무튼 주말’ 책임자였던 김윤덕 기자는 인터뷰를 잘 한다. 아니 그보다는 글을 잘 쓴다고 하는 게 더욱 정확할 거다. 글을 잘 쓰려면, 무엇보다 궁금한 게 많아야 한다고 본다.
챗봇 잘 이용하기 위해서처럼 좋은 질문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김윤덕의 참으로 길고도 긴 인터뷰의 리드는 이렇다.
“60년 아나운서 외길을 어떻게 걸었느냐 묻는 이에게 김동건은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답한다.”
<이반…>은 러시아의 노벨문학상 작가 솔제니친 출세작이다. 수용소에 끌려온 이반의 하루를 시시콜콜 그린 작품이다.
“이반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온도계가 영하 40도 아래로 내려갔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40도 아래로 떨어지면 그날 작업이 취소되니까요. 그렇게 저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60년 산 것뿐이에요. 그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내가 무릎을 쳤다니까요.”(김동건)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반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날 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일을 매일 그렇게 살았다.”
김동건 아나운서를 한 10년 전 쯤 점심 자리에서 만났다. 名아나운서 70세 중반 무렵으로 구수한 입담과 매너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평양예술단공연, 이산가족 찾기, 파독 30주년, 중동 근로자 위문 현장들…역사에 남을 장면과 순간에 그는 늘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그 가운데 40대 중반에 한 ‘이산가족 찾기’를 나는 최고로 친다.
“1983년 전국을 울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도 진행하셨죠?”(김윤덕)
“황해도 사리원 정방산 밑에 어머니 묘지가 있고 전쟁 때 납치된 아버지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다면 무덤은 있는지 알 길이 없는데, 내 앞에서 울고불고 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가족을 만났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그는 딸임을 확인하고선, 어머니가 실신해 난리가 난 스튜디오에서 ‘아!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라고 토로해 시청자들의 가슴을 아릿하게 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회자된다.
“그 어머니는 자나깨나 잃어버린 딸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 거 아니에요. 어디에서 식모살이는 하지 않나, 밥은 굶지 않나. ‘이게 무슨 비극인가’라는 탄식밖엔 나오지 않더군요.”(김동건)
1985년 남쪽 예술단을 이끌고 평양 갈 때는 유서를 써놓았단다.
“내가 이북서 피란 온 사람이고, 아나운서 하면서 김일성 욕을 많이 했기 때문에 평양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텼어요. 그랬더니 장세동 안기부장이 찾아와서는 ‘김 동지, 이건 나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지엄한 나라의 명령입니다’ 그래요. 어머니가 알면 까무러치실 테니 TV부터 고장 났다고 치워놓고, 내가 제일 믿는 후배에게 유언을 하고 갔지요. 내가 만일 못 돌아오면 우리 색시를 너희 아내처럼 똑같이 돌봐주고 우리 애들도 너희 애들처럼 똑같이 키워달라고.”
“방송을 보니 첫인사부터 아주 여유만만하시던데요?”(김윤덕)
“급한 상황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능력이 생겨요(웃음). 막이 오르길 기다리면서 초조해하는데 평양대극장 지배인이 다가와서 물어요. ‘김 선생, 전투 준비는 끝났소?’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합니다’ 했더니, 이번엔 ‘지령장을 볼 수 없습네까?’ 해요. 지령장이 뭔가 했더니 큐시트야. 음향실은 ‘소리 초소’고요. 순간 ‘아, 내가 방송하는 걸 전쟁한다고 말하는 나라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더군요…”(김동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서독과 건설 근로자들이 많은 리비아에도 위문공연을 다녀왔다.
“파독 30년 되던 1993년에 서부 독일에 갔는데 오륙천명이 모였어요. 간호사들은 죄다 한복을 입고 왔고요. 현지에서 고용한 독일 오디오맨과 카메라맨들이 나더러 ‘대체 이게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물어요. 내가 한마디 하고, 가수가 한 곡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우니까. 공연이 다 끝났는데도 안 가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니까. 베를린에서 8시간 자동차를 운전해서 왔다는 한 남자는 공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울어서 나도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같이 울었어요.”
“김동건 아나운서도 웁니까?”(김윤덕)
“‘한국, 한국인’이란 프로에 소녀 가장 셋이 나왔어요. 대본을 미리 보니 할머니와 둘이 사는 6학년 아이가 학교까지 30리를 걸어서 다닌대요. 그래서 내가 꼭 자전거를 사주리라 마음먹었지요. 그러고 방송이 시작됐는데, 내가 아이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으냐 물으니 아이가 글쎄, ‘어머니’라는 거예요. 아이고, 그때부터 내가 눈물이 나오는데 멈추질 않아서 방송이 1시간 이상 중단됐어요.”
“세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떠올랐을까요?” 윤덕이 삽상하게 질문한다. “길러주신 어머님(이모)이 팔순이 넘은 어느 날 나를 불러서 사진 석 장을 주세요. 이젠 너도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니 알아도 되겠다. 이게 너의 친어머니다. 나는 너의 큰 이모고…. 그날 밤 20대의 어머니 사진을 펼쳐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는 미스코리아대회도 무려 30년을 진행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김동건을 가장 부러워했다지요.”(김윤덕)
“…말 만한 여자들 70명이 수영복을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든 이뻐 보이려고만 노력하니 모든 게 자연스러울 리 없고. 인기는 많았지요. 길거리에 택시가 한 대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인들 손녀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만뒀어요…”
마당발 아나운서 김동건 인맥은 방대하다.
골프에 입문한 아들이 소싯적에 “아빠, 나한테 왜 이렇게 삼촌이 많아?”라고 했을 정도다. 방송가에선 김동건이 밥 잘 사주는 선배, 오빠로도 유명하다.
“누가 그 돈을 다 어떻게 대냐고 물어요. 근데 후배들에게 밥 안 사주고 돈을 모았다고 해서 63빌딩이 내 것이 되겠어요?”
산악인 고 박영석에서 LG 구본무 회장까지 스스럼없이 사귀었다.
그에게 가장 깊고 선한 영향을 준 사람은 단연코 김동길이다. 작년에 임종을 지켜보고, 연세대에 시신 기증할 때도 함께 했다.
김동길의 저서 <링컨의 일생>을 아직도 머리맡에 두고 있다.
“김동길 박사는 형님, 스승이고 아버지 같은 분”(김동건)이란다.
“왜 그렇게 김 박사를 따랐습니까?”(김윤덕)
“선생님처럼 되는 게 내 소원이었어요. 서슬 퍼런 유신과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그는 남자로 태어나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죠.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따뜻하고. 집, 통장,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 세상에 다 내주고 빈손으로 떠나셨지요.”
두 사람은 이북 출신 3.8따라지들로 평양과 해주가 고향이다.
“김 박사와 냉면집에 갔는데 어느 손님이 ‘여기 당추가루(고추가루) 개져오라우’ 하는 거예요. 직원이 못 알아듣고 ‘뭐요? 뭐라고요?’ 묻는데 둘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날 길러주신 어머니도 북한 사투리를 무섭게 쓰셨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씨름한다고 들끓으면 어머니가 뛰어나와서는 ‘야, 이거 뭐이 떴다 날아디게 고구기래’ 하시면서 혼을 냈지요. 그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표준말 쓰는 아나운서가 나왔느냐 묻는 이들이 많았어요(웃음).”
“고 김동길이 생전에 ‘연세대 출신으로 일반 대중이 다 아는 세 사람이 있는데, 윤동주 김동건 최인호’라 했지요?”(김윤덕)
“제자 기를 살려주려고 한 말씀인데 당치도 않아요. 학창시절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도 야단 한번 치지 않았어요. 언더우드 동상 밑에서 싸움이 나서 내가 타잔같이 이리 뛰고 저리 날면서 제압을 하지 않았겠어요? 근데 친구 한 놈이 김동길 교수님이 2층에서 싸우는 걸 다 봤다고 해요. 아이고야, 죽었구나 했지요. 그런데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그 얘길 한 번도 안 하셨어요. 밤낮 ‘너는 대체 못하는 게 뭐냐’만 물으시지…”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따듯한 말도 했다.
“억대의 연봉을 받는다, 출세를 했다, 그런데 나이가 팔십이라면, 난 그런 거 안 하겠어요.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젊음을 사지요…”
인생이 무엇이냐는 말에 절창으로 답한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밖에 초대받을 수 없는 자리’라는 김남조 시인의 말을 좋아해요. 그런데 인생은 너무 짧지요. 아나운서 60년이 된 날 축하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그랬어요. 60년이 너무 짧더라, 내가 60년간 해온 일이 단 열 마디로 설명이 되더라.”
올해 그는 여든다섯이다.
“절해의 고도에 갇혀 일하는 등대지기가 몇 백배 훌륭하지요. 양식을 실어다주는 배가 와야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유일한 낙이라고는 라디오 듣는 게 전부이나, 그가 매일 밤 밝히는 등대를 보고 수많은 배들이 뱃길을 찾아다니지 않았겠어요…”
지난 3월 1일로 김동건 아나운서는 방송 인생 60주년을 맞았다.
가족이 월남해 살던 명동 밥집에서 김윤덕 기자와 서로 만났단다.
60년 아나운서의 인생은 돈과 권력을 좇지 않아 가능했다.
“60년 동안 날 봐준 시청자들 덕분이지요. ‘저 사람 왜 또 나와?’ 하면 방송에 나갈 수 있겠어요? 국민 없는 정부가 없듯이 시청자 없는 방송이 없지요.”
정계 등과 인연에도 귀에 남을 말을 털어놨다.
“내가 아나운서클럽 회장을 할 때 사무국장이 와서 돈 쓸 일이 생겼다고 해요. 아나운서 하다가 국회의원 된 사람이 8명인데 축하패를 해줘야…국회의원 하다 아나운서가 됐으면 준다, 그러나 아나운서 하다가 국회의원 된 것이 축하할 일이냐 했지요.”
김동건의 업(業)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영국의 표준어는 BBC 아나운서들이 구사하는 언어예요. 일본의 표준어는 NHK 아나운서의 말이고요…그래서 내가 밤낮 주장하는 게 KBS 아나운서의 말이 표준어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나운서들이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국민도 표준어를 익히겠지요…”
‘감사’를 밀어내고 우리말 ‘고맙습니다’를 지켜낸 김동건이다.
“‘고맙습니다’는 하대고, ‘감사합니다’가 점잖은 말이라더군요. 그런데 ‘감사합니다’는 중국 ‘셰셰’에서 온 말이고 ‘고맙습니다’가 우리말이에요. 모든 프로그램에서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를 했더니 처음엔 하대라고 항의가 들어왔어요. 지금은 백화점 직원들까지 ‘고맙습니다’란 말을 많이 쓰더군요. 그거 하나는 보람…”
고 송해 선생도 진행자는 출연자를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아나운서 역시 스스로 주연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프로그램은 망한다…있는 듯 없는 듯 시청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걸 대신 물어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 대통령의 말, 정치인의 말, 아나운서의 말은 신뢰와 겸손이 생명이에요.”
그는 KBS 아나운서 후배들의 귀감이자 본보기다. KBS 아나운서실에는 ‘김동건 상’이 있었다고 한다. 매년 가장 잘한 아나운서에게 자비로 금 한냥을 줬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나운서 꿈을 키웠다. 전축이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걸고 라디오를 들었다. 도시락 쌌던 신문지를 펼쳐 아나운서인 양 뉴스를 낭독했다. 빙 둘러선 아이들이 “와, 똑같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공개방송 날,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도 정동으로 달려 갔다.
“경비 아저씨가 ‘너 또 왔구나’ 할 정도였죠. 자리가 없으니 계단에 책가방을 깔고 앉아서 구경했어요. 장기범 아나운서의 스무고개를 정신 놓고 봤어요.”
1963년 3월 1일, 두드리던 아나운서 실의 높은 문이 열렸다. ‘우리들 세계’ ‘11시에 만납시다’ ‘한국, 한국인’ 등을 맡았다. 그중 KBS ‘가요무대’는 김동건과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1985년 11월 18일 첫 사회를 본 뒤 무려 30년을 했다.
MBC ‘조선왕조500년’ 등 드라마들이 ‘가요무대’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운봉을 비롯해 이미자, 조용필 등 지금은 전설에 오른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우리 가요의 명맥을 되살려놓은 프로그램이었죠. ‘눈물 젖은 두만강’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같은 명곡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어요. 1940년에 만든 ‘나그네 설움’ 같은 노래는 일제 말엽 강제징용을 피해서 만주 벌판을 헤매던 남편, 아들들의 애환과 역사가 담긴 노래예요. 그 곡들을 ‘가요무대’가 다시 살려낸 겁니다.”
노무현 정부 때 사장 정연주가 부임하면서 ‘가요무대’를 하차했다. 화내지 않고 ‘사장이 MC 하나 못 바꾸냐?’라고 한 대인배다. “…그래도 속이 상해 부산으로 내려가 이틀간 술만 먹고 지냈는데 방송국에서 나를 찾고 난리가 났대요. 노무현과 코드가 안 맞아서 내가 잘렸다는 보도가 나가니 정연주가 곤란해져서 ‘가요무대’에 나와 감사패를 받아달라는 거죠. 예능국장이 백번도 넘게 조르니 후배 하나 살려주자…”
KBS의 중립에 관한 지론이다. “…정부로부터 자립을 해야 해요. 영국민의 자부심이 된 BBC처럼 되려면 1981년 5공 초기에 정해진 시청료 2500원을 현실적 수준으로 올려야 해요. 국민 저항이 크겠지요. 그래서 내 생각은 KBS는 정부 예산을 받거나 광고를 일절 하지 말고 수신료로만 운영하게 하는 거예요. KBS 2TV는 민간에 팔고 대신 교육방송을 가져오고요…”
김동건 아나운서의 만수무강과 백수까지 업을 계속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