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⑨]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김대중의 정계은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교수] 민자당의 대항세력으로 등장한 통합 야권은 모두가 국민적 합의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反)정치적이었다. 그리고 계파들 스스로 기왕의 대표성 위기를 한층 심화시킨 정치적 자의의 표출 결과였다. 따라서 선거가 정당과 계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한국정치의 계파결정요인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선거에 의해 계파가?재구성되고 정당구조가 바뀐다 해도 유권자들의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선거후 자의적 행태는 계파정치로 인한 기존의 위기구조를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의 선거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자신을 억압할 인물을 자신의 손에 의해 4년에 한 번씩 선택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14대 총선을 전후로 결성된 대여강야의 정당구조는 이면에 도사린 ‘기형성’과 해소되지 않은 정치적 한(恨)을 동시 반영한다. 무엇보다 국민당의 급부상은 이 같은 성격을 강하게 반영한다. 특정 계파?스스로 생존·적응하지 못하고 그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빌미를 발견할 때, 그리고 더 이상 정치적 예상실익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신의 정치적 소속과 입지점을 일탈하는 현상을 우리는 해방 이후 정당사에서 무수히 발견한다.

국민당이라는 급조(急造) 정당이 그 연장선상에?있다. 민자당이 ‘구국의 결단’이란 슬로건으로 합당 명분을 찾았던 것처럼 국민당은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다. 하지만 당시 총선에 반영된 것처럼 당의 이중적 한계는 정주영이라는 인물 중심성과 일부 지역의 지지기반을 갖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확인되었고 그 개인의 사적 동기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을 기반으로 한 권력추구와 현대그룹의 불이익 처분에 대한 정치적 보상심리 등 ‘한풀이’ 정치심리가 중첩 작용한 셈이다.

‘반(反)민자’를 목표로 대여강야구도를 깨고자 할 경우 국민당이 여야 어느 계파와 연계할 지는 당시 상황에서 일단 해소할 수 있는 문제였다. ‘민자·민주’ 양대 정당들이 이들을 자파에 끌어들이려 노력할 일은 불 보듯 뻔했고 국민당 역시 최대한 계파?관리를 통해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속하고 한(恨)의 해소를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란 분석도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또 다른 이중성은 반여반야(半與半野)?정당구조에서 발견된다. 국민당은 창당 단계부터 민자당 공천탈락자들과 과거 야당경력으로 점철된 원로급 정치 예비군들을 정치적 재생산구조 강화를 위한 자원으로 최대한 활용한다. 여야 가리지 않는 국민당 지도부는 정당결성 후의 모습보다 정당결성 그 자체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야당 모습을 갖추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과거의 야당과 여당 경력을 고루 갖춘 인물들을 단일 계파로 포섭하려는 이중성을 보인다.

국민당 지지와 같은 일종의 정치적 반발 심리는 85년 2월, 12대 총선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선거 실시 불과 3주 전에 창당된 신한민주당이 대도시에서의 압승결과 제1야당이 되고 기존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이 패배 후 당이 분열되어 의원 대부분이 신당에 가입, 와해된 사실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식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식 모습 <사진=유튜브>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당대 한국계파정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한국국민당을 제외하고 야권 거의 모두가 신한민주당으로 통합됨으로써 5공의 시험적 다당제가 구체제적 양당제로 복귀한 사실을 14대 총선 유권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난 87년 대선정국에서 신한민주당을 모체로 출발한 한국의 신야(新野) 정치권이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으로 세포분열하고 이어 평민당이 신민주연합과 민주당으로 변신, ‘민정-통일민주-공화’가 민자당으로 이합 집산한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민당 또한 표류하는 잠정적 정치집단으로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뭘 뜻할까 ? 지난 수십년간 ‘여소야대-거여야소-대여강야-반여반야’의 모습으로 변신한 한국정당구조의 기형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오로지 대권 도전을 향한 끝없는 욕망과 포기할 수 없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된 각 수장들의 정치행위나 정당구조의 기형성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일까?

지난 1992년 정계은퇴를 선언한 당시 김대중 민주당 후보
지난 1992년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당 후보 시절 모습 <사진=MBC뉴스>

이 같은 물음은 14대 대선 전까지 빈번하게 제기된 정치적 회의론의 골자였다. 그러나 14대 대선이 김영삼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정당구조는 또 다시 양당구도로 바뀐다. 특히 김대중의 정계은퇴와 정주영의 의원직 사퇴는 민주당과 국민당 지도부를 크게 흔들고 이들 없이 새로운 야권을 재편성, 신 집권세력으로 김영삼의 민자당과 공존·경쟁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연출한다.

김영삼은 42%란 비교적 압도적 표수로 당선된다. 비록 58% 반대와 기권이란 표의 한계를 안지만 과거 대통령 당선자보다는 훨씬 강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김대중 없는 민주당과 김영삼 총재의 민자당, 미미한 흔적만 남은 국민당으로 대변되는 1993년의 양당 지배구도는 결국 ‘강여약야’의 정당구조로 바뀐다.

13대 총선 후 5년간 한국정당구조는 크고 작은 변화를 겪는다. 즉 ‘여소야대→거여야소→대여강야→반여반야→강여약야’의 변화다. 이런?변화는 한국정당이 평균 1년에 한번 씩 힘의 균형을 잃거나 심한 갈등에 휩싸이는 등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당의 생명을 유지했음을 뜻한다. 당의 생명력은 유지되었어도 힘의 균형과 정치질서의 안정적 유지가 극히 힘들었던 건 한국정당이 단지 계파를 담아내는 지도자 정당으로만 자기 정체를 보존한 까닭이다.

김영삼의 정치권력장악은 한국정당체계와 인적 구성에서 상당부분 3·4공의 양당 대결구도를 계승한다. 김영삼 총재의 민주계와 김종필 대표의 구 공화계, 정치군부출신들과 민간정치세력 일부를 담고 잔존하는 구 민정계, 게다가 김대중은 물러났으나 그를 대신한 평민당 적자들로 구 민주당 이기택 계와 공존을 도모하는 민주당내 다수 계파의 혼재는 정치엘리트 다수가 정당 안에 숨어들어 자기 무리의 신경조직을 튼튼히 키우는 정치현실을 잘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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