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세 여인과 ‘비익연리’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사자성어는 당대(唐代)의 시인이며 정치가인 백거이(白居易 樂天 : 772~846)의 ‘장한가’(長恨歌)에서 비롯됐다. 백거이는 이태백(李伯), 두보(杜甫), 한유(韓愈)와 나란히 꼽히는 당시(唐詩)의 거장이다.
‘장한가’는 사랑하던 양귀비(楊貴妃)를 잃은 당 현종이 연인(戀人)을 그리는 모습에서 모티브를 잡은 연가로 알려져 있다. “하늘에 있을 땐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 있을 땐 연리지(連理枝)가 되자”는 말에서 나왔다.
‘연리지’는 원래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 말로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기 좌우 날개 하나씩만 갖고 있어 한 쌍이 몸을 나란히 합칠 때만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다.
‘장한가’(長恨歌)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네
둘이서만 아는 서약 들어 있었지
칠월칠석 장생전에서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이던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
필자의 덕산재(德山齋) 거실에 100년도 넘은 ‘연리지 소사나무’가 있다. 거실에서 쉴 때마다 가끔 이 연리지를 보며 아득한 옛 사랑의 추억에 몸을 싣는다. 그런 사랑 중에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이 있다.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 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집 딸이 주인공이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지어 정 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 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정 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한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 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 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서울에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女專)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 회장에게 “한번은 꼭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직접 와주세요. 자금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거에요.” 그런데도 정 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경리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 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 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 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난 것이다.
정 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 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여인은, 통천 이장 집 딸이었다.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을 볼 때마다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정 회장 나이 열일곱 살 때, 네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 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주영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갔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한다.
정 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갔다. 그곳에서 정 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정 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 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정 회장도 2001년 3월, 그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