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의 꿈①] 정주영이 세우고 현정은이 지킨 현대상선 이대로 스러지나?
조선과 해운, 이 둘은 포기해선 안될 우리 삶의 젖줄이다. 그런데 조선산업이 혼돈의 터널 속에서 아직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해운산업마저 최악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현대중공업 초창기 정주영 회장을 도와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토대를 닦은 황성혁 황화상사 대표가 <조선학회지>에서 실은 ‘현대상선의 발자취’를 보내왔다. 그는 “현대상선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고?미래에 대한 소망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황성혁 대표는 “원고를 보냈을 때 한진해운은 아직도 괜찮은 상황이었다”며 “현대상선이 현정은 회장의 회생으로 회생의 가닥을 잡은 반면 한진해운은 한진그룹, 은행,?정부관료들 사이에 서로 네탓공방만 치르며 골든타임을 놓쳐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편집자>
[아시아엔=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전 현대중공업 전무] 전 세계 해운업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현대상선은 일단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업계에서는 한때 “US Line 이후의 최대 콘테이너 선사의 파산이 목전에 왔다”며 현대상선을 하루하루 새로운 고비를 넘기는 중병 환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상선은 살아남았다. 회사의 시작과 그 동안의 성쇠를 되짚어보고 앞날을 생각해본다.
현대중공업이 첫 초대형 유조선(VLCC)를 인도한 것은 1974년 11월이었다. 조선입국의 꿈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조선소 착공한지 2년반 남짓 기간, 외국에서 같으면 조선소 완공에도 부족한 짧은 기간에, 조선소 준공과 첫 VLCC 인도를 모두 해낸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주의 고압적인 횡포가 자행되었고 영국으로부터 도입된 기자재는 끊임없이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조선소의 최고 경영자와 관리자들, 작업자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의 총화라고 일컬어지던 VLCC를 이 척박한 땅에서 완성해 내었다. 세계 석유업계의 대세인 Shell에 용선이 되었던 그 배는 완성과 동시에 인도되었고, 큰 돈이 들어와 어려운 시기에 크나큰 희망을 이 땅에 베풀었다.
현대중공업은 열 척의 VLCC 주문을 손에 쥐고 배를 짓기 시작하였다. Livanos사로부터 두 척, 일본 Kawasaki Line과 Japan Line으로부터 각각 두척, 홍콩의 Island Navigation사로부터 두 척, 역시 홍콩의 World Wide사로부터 두 척이 확보되었다. 70년대 초 VLCC 없이는 원유의 수송이 불가능할 것 같던 시장분위기가 현대중공업의 시작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1975년 닫혀있던 스웨즈 운하가 재개통되면서 분위기는 급냉 하였다.
18만 톤 이하의 선박만 통행이 가능했던 운하의 깊이 때문에 25만 톤 크기의 VLCC는 용도가 제한되었던 것이다. 우선 Livanos는 용선이 되어있던 첫 배는 가져갔지만 용선이 되어있지 않던 두 번째 배는 온갖 트집을 다 잡아 작업을 지연시켰고, 계약서상의 자동 해지기간(Cut off date)인 1975년 6월말을 넘기고 전 감독관들을 철수시켰다. 경험 없는 조선소의 첫 번째 배라는 약점을 이용해 건조계약서는 선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졌다. 자동계약해지기간이 지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선주는 계약을 취소할 자격을 갖게 하였고, 외국은행이 발급한 지급보증에 따라 선주가 그동안 지불했던 돈은 그날로 선주에게 되돌아가게 되었다. 선주의 부당한 지연행위에 대해 조선소는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했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을 요하는 절차였고, VLCC 한 척은 기약 없이 조선소 앞바다에 계류되었다.
VLCC 열 척 중 나머지 배들은 그런대로 인도가 되고 있었는데 홍콩의 Island Navigation(INC)이 문제를 일으켰다. Livanos는 기술적인 문제를 핑계 대고 인도를 지연시켰고 그에 따라 계약을 취소시켰으나, INC측은 노골적으로 “본 계약을 지속 할 수 없는 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약을 취소한다”고 일방적으로 인도 거부 통보를 해온 것이다. 산덩이만한 배 두 척이 추가로 조선소 앞바다에 묶이게 된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한국 중화학공업의 기수로서 한국 수출산업의 첨병으로서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던 조선소의 앞날이 두꺼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1억불이 넘는 어마어마한 선박 세 척이 조선소 앞바다에서 하루가 다르게 고철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소 초창기부터 “초대형 조선소는 한국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현대조선은 이제 끝났다”고 장담했다.
엄청난 위기였다. 조선소의 존망이 걸린, 어쩌면 한국 중공업의 앞날이 그 떡잎부터 잘려 나갈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정주영 회장의 손이 닿으면 위기는 기회로 바뀌었다. 모두들 VLCC 세 척이 고철로 썩어간다고 걱정하는 동안 그는 그 세 척을 선박 고유의 목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정부 정책 입안자들과 담판을 벌였다. 우리나라 원유를 도입하는데 세 척의 우리나라 VLCC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산업화 초기 민족자본이 형성되기 전, 한국의 정유소는 미국의 석유 대자본(Oil Major)들의 자금으로 건설되었다. 그들은 정유소의 건설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원유의 도입권을 독점했다. 모든 원유의 도입 가격과 조건을 그들이 결정했다. 원유의 수송권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
정 회장은 그들의 원유 수송권의 일부를 나눠 갖자고 용기 있게 부딪혀 나갔다. Oil Major에게 마냥 끌려 다니던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이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아이디어였다. 미국 업자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수송권 독점은 한국이 수송할 선박을 갖고 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인데, 한국이 VLCC 선대를 갖고 있는
한 독점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원유 운송에서 큰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VLCC 세 척을 함께 운용하면서 운임을 차별적으로 낮출 수도 없었다. 정 회장은 고철이 될 뻔한 고가의 VLCC를 활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높은 운임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 상선의 순탄한 시작이 되었다. 1976년 즈음의 일이었다.
1976년은 현대그룹에 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라는 거의 10억불에 가까운 계약이었다. 그때 환율로 따지면 4600억 원 정도였는데 그 해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50만 톤급 유조선 4척을 접안 할 수 있는 산업항 공사는 대부분 철 구조물로 이루어졌다. 사우디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려할 때, 현지 제작보다는 한국에서 구조물을 제작해서 해상 수송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정 회장은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한 공정은 외국인 경쟁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원가절감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일감 부족으로 고민하던 현대중공업은 두둑한 작업량을 확보하였다. 아세아상선도 막대한 수송물량을 확보하여 살물선(Bulk Carrier)을 선단에 추가하였고 해운회사로서의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아세아상선이 현대상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83년이다. 그때는 현대자동차의 수출물량까지도 담당하는 현대그룹
의 해운물류부문 회사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이었다고 기억한다. 일본의 세계적 자동차 운반선 회사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자동차 물량을 척당 20% 정도만 확보해주면 현대중공업에서 자동차운반선을 연속 건조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그럴듯한 아이디어로 들렸다. 자동차 수출은 자동차를 수입하는 나라의 경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수출이 저조할 때는 울산 앞바다에 열 척이 넘는 비싼 자동차 운반선이 할 일이 없어 계류되어 있곤 했다. 따라서 많은 선박을 보유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자동차 수송 물량을 외국 선사에 나누어 주면서 자동차 수출의 부침에 대응하고, 한편으로는 어려운 시기에 조선소의 물량 확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 회장에게 일본 해운회사의 제안을 보고 했다. 반색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 회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거 봐. 자네는 그렇게 나와 일을 했으면서도 내 생각을 그것밖에 못 읽어? 나는 우리 자동차를 한 대도 일본 배에 실어 나르지 않아.” 머쓱해서 물러나려는 나를 붙들어 세우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일본과 일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두고 봐. 이 자동차 운반선은 두고두고 현대상선을 먹여 살릴 현금제조기 역할을 하게 될 거야.”
정 회장의 생각이 정곡을 찌르는 진리라는 것을 두고두고 실감하고 있다. 현대상선의 정몽헌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은 뒤 현대상선은 오히려 그룹회사로부터 경원되면서 그룹해운물류 회사로서의 혜택을 점점 잃게 되었다. 한편으로 현대상선은 독립해운회사로서의 행보를 넓혀갔다. 콘테이너선 선대를 확장시켜 나갔고 국내 최초의 LNG선 운항을 개시했다. 금강산 유람선을 취항시키고 금강산 개발 등 정주영 회장의 꿈을 이루는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업계 최초로 매출 3조원을 달성했다.
그러나 IMF가 터진 1998년의 외환위기를 그룹사의 협조 없이 이겨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꿈이 담긴 60여척의 자동차 운반선이 스칸디나비아의 해운회사에 매각된 것은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도 살을 에는 아픔이었다. 현대자동차가 5년간 적하보증만 해주었으면 파국은 충분히 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업계의 생각이었지만 현대자동차는 외면하였다. 그것은 현대자동차로서도 모험이었다. 자동차 수송을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거친 손에 맡긴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현대 글로비스를 탄생시켜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 했으나 정 회장의 꿈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