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삼국지 황성혁의 몽환적 유럽여행기③] 비틀즈와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6.10. Burton on the Water (2)

[아시아엔=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2013년 6월 9일(일요일)

전날 하루 긴긴 날을 보냈다. 호숫가 언덕 위 식당에서 저녁 늦게까지 노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Lake District를 맨 낯으로 만나고 William Wordsworth와 인사를 나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8시부터 30분쯤 호텔 앞 Windmere호수를 거닐었다. 어딜 가나 백조와 오리와 수많은 새들이 평화롭게 사람의 삶에 잘 어우러져 있다. 서로 어려워하지 않고 서로 방해하지 않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아침은 서늘했다. 70년대 말 런던지점에 근무할 때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와서 한적한 곳에 있던 캠핑장에 하룻 밤 묵고 간 적이 있다. 봄이었다. 넓은 호수의 가장 자리는 미풍에 춤추는 노랑색 맑은 수선화로 덮여 있었다.

Windmere호수 북쪽 끝 Westmoreland의 Grasmere로 갔다. William Wordsworth의 동네였다. 그는 18살 되던 해, 마을의 무도회장으로부터 돌아오던 새벽, “호수의 잊지 못할 장관에 의해 자신이 시에 바쳐진 영혼”임을 자각했다 한다. 일흔세 살에 “왕실을 위한 공식적인 시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관시인 지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선천적인 어슬렁거림의 삶’을 만끽하며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인간의 서정을 노래했던 것이다. Dove Cottage는 그가 누이동생 Dorothy와 함께 ‘위대한 10년’을 산 자그마한 집이었다. 정부가 사들여 완벽하게 관리하는 정통 영국식 문화유산이었다. 안내인은 집안 구석구석 안내하였다. 집안 일은 헌신적인 누이동생 Dorothy 몫이었다. 그 집은 오히려 Dorothy의 인간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소 같았다.

Dorothy 자신이 훌륭한 작가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일기(Grasmere journal)를 남겼다. Grasmere의 아름다운 자연과 수시로 변화하는 신비스런 모습을 그렸다. William은 그녀의 일기에서 많은 부분을 택해서 그의 시를 만들었다. Daffodils 같은 시는 Dorothy의 일기를 따와서 약간의 운을 붙이고 시적인 구성으로 바꿨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안내인에게 불쑥 물었다. “두 남매간에 감정적인 충돌 같은 것은 없었나요?” “무슨 뜻이죠?” “가령 Dorothy가 묘사해 놓은 것을 William이 인용해서 William의 것으로 만들어 William만 결과적인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 Dorothy가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나요?” 안내인은 환하게 웃었다. “Dorothy는 그녀의 오빠가 그녀의 것을 더 많이 가져가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기만 바랐을 거예요.” 역시 천사 같은 여인이 William의 성공을 도왔던 것이다.

나는 <The Golden Story>라는 얇고 예쁜 책을 샀다. 거기에는 William의 가장 사랑 받는 시들과 그 시들이 영향 받은 Dorothy의 일기를 함께 싣고 있다. A Wild Child, Image of Grasmere, Daffodils, A Night Sky 등 아름다운 시들이다. 그리고 접시를 하나 샀다. 노란 수선화와 함께 Daffodils의 첫 연을 담은 아름다운 것이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언제나 읊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Dove Cottage의 정원도 둘러보았다. Lavender꽃들이 Dorothy의 손길이 가던 그 시절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William의 “사물을 보는 눈과 즐길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와서 나눌 권리가 있다”는 말을 새기며 Lake District를 떠났다. Peter Rabbit을 창작한 Beatrix Potter의 생가 박물관이 Windmere 호숫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떠났다.

Windmere를 떠나 거침없이 달려왔는데 Liverpool에 들어 서면서 교통체증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가 지났다. Liverpool 하면 옛날엔 대서양 물류의 중심지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하나였다. 그러나 해변으로 들어서면서 눈에 띄는 것은 문이 닫힌 수많은 거대 창고들과 창고의 깨진 창문이다. 뉴욕의 ‘깨어진 창문’ 이야기가 생각났다. 빈곤과 우범의 상징이던 할렘가에서 깨진 창을 새 것으로 바꿔 끼는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마약과 범죄의 소굴이 아름다운 문화의 거리로 바뀌었다는 ‘깔끔한 유리창 한 장의 기적’ 이야기다. 유리창 한 장이 깨지면 사람들의 심성이 자연스럽게 거칠어져서 또 다른 유리창을 깨게 되고 범죄의식이 적어진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린 것이다. 어둡거나 흐린 날은 근처를 지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을씨년스런 곳이다. 70년대 노동자 파업을 거치며 치유하지 못한 영국병의 상흔이다.

드디어 Beatles Story에 도착했다. 바닷가 거대한 건물, Albert 도크 지하실 어두컴컴한 좁은 공간에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를 기억하듯, 찰스버그를 모짜르트가 상징하듯, 지금의 리버풀은 비틀즈가 상징하고 있었다. 1962년 첫 싱글을 내고, 1963년 영국을 정복하고, 1964년 세계를 석권한 20대 대중문화 아이콘들의 발자취를 모아 놓은 곳이다. 215곡을 발표, 전세계에서 13억장의 음반을 팔아 낸 John Lenon, Paul McCartney, George Harrison, Lingo Starr 들이다. 그들과 같은 나이였던 팬들은 이제 70대, 80대가 되었고, 그들의 아들, 그들의 손자 대에 이르러서도 Beatles의 열정을 함께 기리고 있다. Beatles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그들을 세상에 소개시킨 Bill Harry와 그들의 매니저였던 Brian Epstein의 사무실, 그들이 악기를 샀던 가게, 녹음실, 그들이 입었던 옷들, 그들이 초기에 연주했던 클럽들을 모두 재현시켜 놓았다. 그 모든 것들이 단순하고 초라할수록 더 가치있고 의미있어 보였다. Epstein의 말이다. “나는 그들을 전혀 몰랐다. 어느날 음반사에 듣도 보도 못한 Beatles의 ‘My Bonnie’를 찾는 손님이 이틀에 세 명이나 있었다. 호기심에 그들의 연주를 보러 갔다. 그들은 깔끔하지도 않았고, 연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관중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무언가 인간적인 자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 빠져 들었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젊은이들은 대중음악의 활화산을 일으켰고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윤택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리버풀은 그들의 사소한 물건 하나까지 소중하게 수집하고 자랑스럽게 전시해서 Beatles Mania의 성지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Beatles의 팬이 아니더라도 팬이 되게 하는 매력과 엄숙함이 있었다. 나는 그 번잡하고 소란스런 굴속 같은 성지를 도는 한 시간 동안“Yellow Submarine,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끊임없이 흥얼거리고 다녔다.

Oh yeh, I’ll tell you

Something I think you will understand

And I say that something

I wanna hold your hand

I wanna hold your hand

Liverpoolatford로부터 Stratford Upon Avon까지는 거의 두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20세기의 아이콘인 Beatles에게 하직을 고하고 세계 최고의 고전작가 Shakespeare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다. Liverpool 가는 길이 좀 밀렸고 Beatles Story 속에서는 점심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샌드위치를 사서 가는 길에 차 속에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늙은이들이 마치 이팔청춘처럼 설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이팔청춘처럼 원기 왕성했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마음을 젊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일뿐이었다.

딱 2시간 20분 걸렸다. Stratford Upon Avon에 도착하니 오후 4시 40분이었다. 우선 Q호텔에 짐을 풀었다. 해도 아직 중천에 떠있고 볼 곳도 많았다. 떠나면서 Shakespeare극장의 공연 스케줄을 점검했었다. Hamlet 공연이 토요일 오후 2시에 있었다. 그리고는 주말에는 공연이 없다. 하도 억울해서 Scotland에서의 시간표를 조정해 토요일 공연에 맞추어 오려했으나 불가능했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영국의 런던에서도 Shakespeare 연극공연이 빈번하지만 현대화된 번안 공연이 대부분이고, Shakespeare의 원 대본과 고전적 무대에 의한 공연은 드물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다음에는 일부러 시간을 맞추어서라도 공연에 맞게 와야지.

Shakespeare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진부한 사족이다. 그는 Elizabeth I세 여왕 아래 영국전성기에 문예부흥을 이끈 명실상부한 대가(Master)다. 그의 36편의 희곡은 무수한 명대사와 더불어 시공을 초월한 인간 삶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현대영어의 틀을 형성해 낸 창조자다. 그의 묘비명처럼 “네스터의 판단과 소크라테스의 직관, 버질의 예술성을 지닌” 완벽한 인간의 전형이다.

Shakespeare박물관과 그의 탄생지를 지나 Shakespeare극장과 그 주변을 두루 둘러보았다.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곳곳에 물과 초원과 나무, 벤치 그리고 구석구석에 Shakespeare연극의 주인공들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평화롭고 편안한 환경이 위대한 인간을 낳는 것인가, 위대한 인간이 있어 이런 환경이 생성되는 것인가. Ayr와 Lake District와 Stratford Upon Avon을 거쳐오면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극장 근처 식당 Encore에서 전통적 영국식 저녁을 들었다.

6월10일(월요일)

Q호텔은 널찍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정원도 탁 트였고 방도 넓어서 아주 편히 잘 잤다. 아침 여덟시 못 미쳐 출발해서 Cotswold의 Burton on the water에 아홉시 쯤 도착했다. Wold의 뜻은 구릉이란 뜻인데 구릉 위 물에 떠있는 마을 같은 곳이다.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아름다운 다리들이 그 위에 걸려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곳을 은퇴 후 제일 살고 싶은 곳이라고 불렀다. 영국에서는 하루에 네 계절이 함께 한다는 말대로 아침에는 초겨울처럼 싸늘했다. 여기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여기 오면 Afternoon tea를 꼭 마셔야 한다는 데 아침이라 마실 수 없었다. 아침과 저녁 두끼만 먹던 시절 Afternoon tea는 샌드위치나 푸딩, 케이크와 함께 들어 공복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지금도 영국의 Afternoon tea에는 상당한 먹거리와 함께 차를 내놓곤 한다. 30분 정도 마을을 걷고 있는 동안 마을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외지인들로 여기가 이름난 관광지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곳은 구석기 시대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로마의 점령시대에는 제법 큰 부대가 주둔했었다고 했다.

Bleinheim궁으로 가는 길에 또 한군데 들를 데가 있었다. Burton on the water 바로 옆에 있는 바이버리(Bibury)였다. 역시 이름도 좀 생소한 Coln강 위에 떠있는 마을이다. 옛날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 살면서 양모를 가공하고 팔아 부촌을 이루었단다. 영국을 휩쓴 19세기 산업혁명도 이 근처에는 범접을 못하고 자연 속의 동화 같은 마을로 남겨놓았다. 송어농장을 찾아 넓은 연못을 한 바퀴 돌았다. 모이를 주면 팔뚝만한 송어들이 징그럽게 몰려들었다. 회귀성 어종인 송어의 성공적인 양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기야 수만 리 험한 물길을 오갈 것 없이 생태계만 맞춰주면 한 곳에서 편안하게 번식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지 싶었다.

영국 시골의 선술집에 가면 흑맥주와 함께 입맛 당기는 싱싱한 송어 튀김을 내놓는다. 그 동네 개울에서 잡았다고 자랑한다. 송어는 영국과 궁합이 맞는 먹거리다. Bibury 마을에도 수많은 관광버스가 와서 특히 일본관광객을 내려놓았다. 꿀벌색 석회암으로 지은 Cotswold Stone Cottage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영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Arlington Row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동화 속 그림같은 사랑스런 마을이다. 현대식 호텔이 줄 수 없는 마음 속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Cotswold의 자랑 Bawley House를 둘러보았으나 결혼식이 진행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언제 한번 와서 들러볼 수 있으려나. 그렇게 영국에서 사람 살기 제일 좋다는 Cotswold를 떠났다.

6.10. Blenheim Palace

블레넘궁(Bleinheim Palace)에 도착하니 정오가 다 됐다. 1704년 스페인 왕위계승권 문제로 벌어진 전쟁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독일 Bleinheim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Elizabeth I 여왕은 그 전쟁을 이끈 John Churchill에게 Malborough 공작 작위와 함께 땅과 성을 하사했다. Malborough 1세는 독일의 Blenheim과 비슷한 지형으로 궁을 지었다. 현재 11대 말보로 공작이 살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 왕족이 아닌 사람이 사는 집으로 궁전(Palace)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뿐이다. 귀족 생활의 호화로움이 질시가 아닌 존경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궁전 내부에는 그리스, 이집트 풍의 조각으로부터 귀족의 일상과 그들이 쓰던 아름다운 유물, 수만권의 장서, 가족을 위한 예배당까지 정성스레 보존되고 있다. 근래 이 성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Winston Churchill의 생가로 또 유명해졌다.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학교 성적은 평범했으나 세상 공부를 많이 한 그에게, 시대는 허물어져가는 대영제국을 그의 어깨에 얹어 놓는다. 스페인, 쿠바 내전에서는 언론인으로, 아프리카와 인도는 장교로 누볐고, 참담한 2차대전에선 국민의 인내심을 일깨우며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자 국민들은 지긋지긋한 2차대전의 기억과 함께 처칠도 축출해 버렸다.

궁전의 뒤 편 환히 트인 정원이 큰 강을 끼고 펼쳐졌다. 그 넓은 공간이 한 점 소홀함 없이 말끔히 손질되어 있다. 떠나기 전 궁궐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간단한 점심이었음에도 한동안 줄 서 기다려야 했다. 영국 국민들과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6.10. Stone Henge (2)

보이는 것은 짓푸른 초원과 거기서 어정거리는 양떼와 푸른 하늘이다. 차는 속력을 있는대로 내어 달렸지만 우리는 차 속에서 Golden Baren을 씹으며 여유로웠다. 오후 4시 Stone Henge 도착. 넓고넓은 솔즈베리(Salisbury) 평원을 배경으로 그 돌의 집단은 서있었다. 약 5000년 전부터 3500년 전 사이에 모양을 갖춘 유럽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유적이라고 한다. 두 개의 동심원 형태의 돌기둥인데 바깥은 혈암(Shale stone)으로 안쪽은 청석(Blue stone)으로 만들어졌다. 안쪽에는 길이 8m에 무게 50t이나 되는 삼석탑(三石塔)이 5개가 있는데 2개는 세워놓고 그 위에 하나를 얹어 놓는 구조다. 그밖에는 모두가 신비스런 의문투성이다.

어떻게 그 시대에 그 부근에서 나지도 않은 거대한 돌을 그렇게 깎아 그렇게 설치해 놓았는지, 그 유적을 세운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을수록 추측만 무성해졌다. 마법사가 던진 돌이 쌓인 것이라는 둥, 마녀들이 제물을 올리고 마술을 부린다는 둥, 외계인들의 접촉 장소라는 둥, 확실한 것은 이 구조의 입구가 하지에 태양이 뜨는 방향에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고대 천문학자들의 우주 관측 장소라는 둥, 지금도 해마다 하짓날 비밀스런 종교단체들이 모여 들어 밀교의식을 치른다고 했다. 지금 그것은 우아하게 관리되고 있고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고, 영국 정부 재정에 쏠쏠한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오후 5시 출발. 열심히 달려서 London의 중심 빅토리아역까지 오는데 1시간 50분 걸렸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 Victoria Palace극장의 ‘Billy Elliot’을 예약해 두었다. 공연시작은 7시 반. 30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극장 앞에 마침 Itsu라는 일본식 음식점이 있어서 우동 한 그릇씩 급히 비우고 극장에 입장했다.

1978년 런던에 왔을 때 이 극장에 제법 왔었다. 아이들 데리고 Musical ‘Annie’도 여기서 보았고 ‘Oliver Twist’도 보았다. 영국은 뮤지컬의 천국이다. 율 브리너와 데보라 카가 주연하던 ‘왕과 나’도 런던에서 보았다. 어른들끼리는 ‘Evita’를 두번이나 보았고 ‘Jejus Christ Super Star’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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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Elliot’은 2006년 이래 Victoria Palace에서 공연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6년 영국에서 올리비에상을 받았고 2009년 뉴욕 Broadway에서 공연하면서 그 해 ‘Best Musical 상’을 포함한 10개 부분에서 수상했다. 1970년대 말 런던 북부의 이야기다. 마가렛 대처 수상으로 대변되는 보수파에 대항하는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다. 열한 살 사내아이가 집안에서 하라는 권투연습은 하지 않고 사내답지 못하게 발레 연습을 한다. 처음 집에서 구박을 받지만 차차 이해를 얻게 되고 훌륭한 발레리나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무대 윗부분으로부터 마녀의 얼굴을 한 대처 수상의 초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가운데 파업이 계속되는 너무나 참담한 이야기였지만, 그 시절을 영국인들은 연극에서처럼 잘 소화하고 있었다. 귀족 작위를 받은 Elton John의 음악이 많이 인용되었다. 무대는 감동적이다. 그저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작품을 몇 년씩 장기공연을 하면 그 무대는 자연스럽게 완벽해지는 것이 아닐까. 두 시간 반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마지막 한없이 박수를 치고 나서니 거의 10시가 가까웠다. Victoria역으로부터 Greenwich로 나오는 길은 수월하게 빠져 나왔다. 10시 반 Greenwich의 Novotel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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