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파산①] 조중훈 회장 창업 50년만에 역사 속으로
[아시아엔=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전 현대중공업 전무] 2017년 2월 17일은 세계 모범이었던 대한민국 산업계가 지금까지 지녀왔던 소중한 긍지에 결정적 오점을 남긴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서울지방법원은 이날 한진해운의 파산을 선고했다. 수십척의 벌커나 탱커는 논외로 하더라도, 1백여척의 최신예 콘테이너선, 세계에 잘 자리잡고 있는 11개의 터미널, 23개의 해외 현지법인, 1백여개의 영업지점, 전 세계 90여 개의 항만을 연결하는 74개 서비스노선을 구축했던 한진해운이었다.
우리나라 최대이고 세계 7위의 해운회사로 미주노선 점유율 7.4% 수준을 유지하여 세계 최대 Maersk Line이나 MSC해운 등과 대등한 경쟁을 하던 당당한 세계적 회사였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들여 이룩한 더없이 귀한 금자탑을 하루 아침에 한 점 후회도 없이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1986년 미국의 US Line이 파산한 후 세계 최대의 정기선사의 파산으로 기록되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이 해운회사를 설립한 것이 1967년이다. 오늘의 한진을 이룩하는데 압축경쟁성장의 모델이라 불리우는 한국에서도 반세기가 걸렸다. 이만한 회사를 만드는데 외국 같으면 몇백년이라는 장대한 역사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은 단 하루만이었다.
세계의 주요항구에서 귀공자 대접을 받던 한진해운 선박들은 2016년 5월 채권단의 자율협약이 시작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바로 압류되기 시작했다. 화주가 이탈하고 해운동맹으로부터 퇴출되고 순식간에 물류대란의 원흉이 되었다. 법정관리 시작 전 106만 TEU(20피트 길이의 콘테이너박스)였던 한국의 콘테이너 선복량은 2016년 말 50만 TEU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대란을 보면서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누구도 살리자고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엇이 이 소중한 기업을 이런 파국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이 정도 회사도 향유할 수 없는 우리 사회였단 말인가. 통탄하고 절통할 일이다. 첫째 기업가정신의 결여를 통탄한다. 이 기업을 이룩한 빛나는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것이다.
1960년대 이미 물류산업에 깊이 발을 들여 놓았던 조중훈 회장이 월남전쟁 중 퀴논항에서 본 것은 위대한 해운의 힘이었다. 거대한 기중기가 화물선으로부터 기관차만한 철제 궤짝을 내리는 것을 보며 그는 넋을 잃었다. 그는 해운 없이는 전쟁도 없고 산업도 없고 국가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물류보국의 기업가 정신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귀국하자마자 해운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1967년 대진해운의 설립이 그것이다, 그는 콘테이너 운항을 시작했다.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오일쇼크를 맞으며 대진해운을 해체할 수 밖에 없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는 끈질기게 해운에 집착했다. 1977년 새로 한진해운을 설립해서 북미항로를 개척했고 대한상선, 거양상선을 합병했고 세계 7대 해운회사로 키워놓았다.
그의 물류 보국정신은 육상수송, 해상수송, 공중수송을 아우르는 종합적 수송 네트워크를 이루어내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는 그의 투철한 기업가 정신으로 한진해운을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02년 말 조중훈 회장의 타계 후 2003년부터 조수호 회장의 독자경영이 시작되었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21세기 들어서며 불기 시작한 중국대륙의 훈풍은 전세계 해운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물동량은 폭증했고 선복량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운임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해운회사들은 돈방석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활황 속에서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룹 내 형제 회사 사이의 반목이었다. 부친이 생존했을 때 하나의 지붕 아래 똘똘 뭉쳐있던 그룹 산하 회사들이 원수처럼 서로 등을 돌렸다. 대한항공 일을 한진해운 친구에게 부탁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마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나을 거야. 그룹사를 통하면 될 일도 깨어져 버릴걸.” 그런 이야기들을 하였다. 한진해운은 한진중공업을 외면하고 다른 조선소에 선박발주를 하였다.
한진해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2006년 조수호 회장이 갑자기 타계한 것이다. 그의 부인 최은영 회장이 승계했다. 기업가로서의 자질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최 회장이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았을 때 아직도 해운시장에는 활력이 남아있었다.
배의 용선료는 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1만달러에 배를 빌려와서 내일 다른 곳에 2만달러에 빌려주는 형세였다. 그 시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회사는 잘 굴러갔다. 쉽고 신나는 장세였다. 하지만 그것은 폭탄 돌리기 게임이었다. 그렇게 돌리다 시간이 오면 폭탄은 어느 한 사람의 손에서 터지게 되어 있었다.
2008년 Lehman Brothers의 파산은 폭탄 돌리기의 끝을 알렸다. 특히 외국선박을 빌려서 운항하던 한국해운회사들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대형 해운회사들이 하나같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 그들이 지불해야 할 용선료는 실제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의 세배, 네배 수준이었다. 그 차액은 빚이 되었고 몇 년 동안 갚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