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3] 3당합당 소외 김대중, 92년 대선 김영삼에 패배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민자당 합당결과를 놓고 김대중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구 신민당 분당 이후 무소속으로 남길 원한 이기택계는 김대중 곁으로 다가선다. 이들의 접근 여부와 관계없이 민자당은 공룡처럼 커져간다. 이들을 견제해야 한다는 국민의 기대는 이기택에게 모여든 반(反)김대중 세를 단일화해야 할 새로운 요구와 부딪힌다. 김대중의 카리스마와 당내 민주화를 부르짖던 소장의원들의 계보 이탈은 국민들에게 참신하게 비친다.

하지만 14대 총선은 야당인(野黨人) 모두에게 외로운 투쟁보다 연합전선의 구축을 자극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중간보스였던 이기택의 정치행각 역시 상당한 한계를 갖는다. 반(反) 양김 소장세력들만 휘하에 두고 투쟁한다 해서 김대중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인지는 극히 의심스러웠다. 결국 이기택은 평민당의 변신체(變身體), 신민주연합 공동대표로 김대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권력교체기와 총선이 임박할 때마다 수많은 정당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고 그 속에서 계파 간 이합집산을 거듭한 한국정치는 6공 말까지 어김없었다. 양김을 여야의 축으로 삼고 정주영을 국민당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세 정파의 대결도 지우지 못할 6공 말기의 자화상이다.

이종찬과 이기택, 박태준과 김종필, 민정당과 평민?민주 등 여러 정당에서 권력을 누린 인물들 다수가 14대 총선과 대선을 고비로 핵심부에서 멀어져 간다.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속에 ‘무리 짓기’와 ‘줄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1992년 계파정치는 3공의 ‘공화-신민’ 대결 이후 가장 심한 갈등과 대립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해방 후 이변을 허용하지 않는 파쟁의 역사는 줄기차게 반복된다. 정책발동을 통한 정당 간 긴장관계는 거의 엿보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유권자들은 새삼 정치를 불신하고 환멸과 실망의 정치심리를 스스로 달랜다. 기대할 것이라곤 이제 거의 없었다. 이상의 실현보다 기형적 정치변동이 겹치는 한국정치풍토 속에서 노태우 집권 2년 만에 단행된 민자당 통합은 파벌대란의 굉음(宏音)만 울려 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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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정치군부의 퇴장과 정치적 재문민화

민자당의 계파 대이동이 자리를 잡자 거대여권은 14대 대선을 향한 힘겨운 레이스를 계속한다. 게임은 이제 김영삼과 김종필의 세 싸움으로 귀결되는 듯 했다. 김영삼과 김종필은 그러나 당내 직접대결을 피하고 ‘포철’을 이끈 박태준을 사이에 끼워 계보조직을 운영하면서 대권고지를 공략해 들어간다. 앞서 살핀 대로 14대 대선 역시 양대 계파의 정치적 한(恨)과 숙명의 살풀이를 위한 한판 굿거리였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내야 끝나고 말 원한의 도드라짐과 이를 정리해야 할 한판 승부로 14대 대선은 끝났다. 김영삼 42.0%, 김대중 33.9%, 물색 모르고 덤벼든 정주영 16.3%.

13대 당시 노태우처럼 김영삼 역시 과반수 이하 득표로 집권하는 해방 후 두번째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과반수 미만이었다 하여 대통령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14대에서마저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를 영원히 은퇴한다”고 발표한 후, 영국 외유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건 당장의 머쓱함을 피하려는 순간의 제스처였을 뿐, 믿음으로 담보된 마지막 결단은 아니었다. 그 순간 적어도 3년 뒤 그가 또 다른 정당간판을 달고 정계에 복귀할 걸 알아차린 유권자는 별로 없었다. 계파 수장들의 ‘외유(外遊)’는 이로써 정치적 격변기의 통과의례이자 정치적 곤란함을 타개하는 면피(免避)용 수단으로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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