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이 이승만 독재 타도 앞장 이철승 영전에 바친 최고의 헌사는?
?”태산 북두와 같은 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인품을 가지신 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소석(素石) 이철승이 타계했다. 사람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또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은 쌓은, 모든 후배에게 귀감이 될 그런 분”이라고 조의를 표했다. 그 압권은 “태산 북두(北斗)와 같은 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인품을 가지신 분”이라는 이회창씨의 칭송이다. 그 자신 많은 정치적 역정을 겪었던 이회창의 회고는 남다른 울림이 있다. 근래 타계한 정치인 가운데 이런 고귀한 평가를 받은 분이 누구였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석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을 영수로 모시고 서북청년회와 함께 대한민국 건국운동의 전위가 되었다. 1948년 4월 김구의 평양행을 막아선 것도 이철승 등의 청년이었다. 이철승은 인촌 김성수에서 고하 송진우로 이어지는 한국민주당의 흐름을 잇는다. 호남의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기반과 일본 유학과 보성전문, 연희전문에서 길러진 인재를 아울러 산업, 교육, 언론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던 한국민주당은 건국 초 이승만 정부를 뒷받침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친일경찰을 이용하자 곧 결별하게 된다. 이철승은 6.25전쟁에서는 학도병을 이끌고 참전했는데, 이 시절 거취가 불분명한 정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을 폭로하여 자유당의 비정(秕政)을 난타하고서는 이승만과 결별하게 된다.
1954년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자 최순주 국회부의장 멱살을 잡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호통치던 이철승은 ‘민중을 이끄는 호랑이’였다. 이승만 독재가 헌병을 동원한 가운데 강행한 1952년의 발췌개헌이 서막이었다고 하면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정당성에 심대한 손상을 입었다. 자유당의 부패로 멍들어 이기택 등이 주축이 된 4.19 학생혁명으로 몰락하게 된다. 5.16이 일어나자 이철승은 야당 중심의 한 사람으로 박정희에 저항하였으나 안보와 정치는 구분하는 냉철을 보였다.
1970년대 이철승은 ‘40대 기수론’으로 새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가열한 박정희의 유신독재 속에서 ‘협상과 타협에 의한 의회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철승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져 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김대중을 따르는 무리는 아직도 많다. 그러나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김영삼에 동참하지 않고 꼬마 민주당‘을 이끌었던 이기택, 공화당에서 3선개헌 반대를 고집하였던 강골 이만섭도 더 깊게 더듬어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정치는 거의 파국에 다다랐다. 19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국회라 함은 의회정치가 최악에 다다랐음을 공언하는 이외 다름이 아니다.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을 모색해야 할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도 경색 일변도다. 20대 총선에서는 이러한 기류를 일신하는 정치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이철승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얼마 남지 않은 유택 가운데 그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철승은 태산(泰山)과 같이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北斗)을 밝히며, 길이 호남인의 긍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