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서 대세론을 등에 업고 한창 질주하던 이회창의 대권가도에 적지 않은 혼선과 차질이 빚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후 박근혜는 유세장마다 이회창의 옆에 서서 지지를 호소했으나 한나라당은 다시 대선패배의 고배를 들었다. 이회창에겐 뼈아팠던 박근혜의 탈당과 한 박자 늦은 복당이었다.
이회창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떠난 2003년의 한나라당에서 박근혜는 부지런히 정치개혁과 국민참여경선,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주장했다. 이 무렵 박근혜는 이전의 조심스런 태도와 달리 당사 기자실에 부지런히 들러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밝히곤 했다. 아마도 박근혜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기가 넘쳤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두 번 연속 대선 패배로 침체됐던 한나라당에서 그래도 ‘가장 생생하고 의욕적이며 개혁을 실천할 능력이 있어 보이던 사람’을 꼽자면 단연 박근혜와 원희룡이었다.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을 비롯해 당의 환골탈태를 주장하던 박근혜는 정치개혁을 선도했고 참신성에서도 단연 선두주자였다.
그를 가까이 또는 먼 발치에서 지켜본 입장에선 정치개혁을 화두로 활력이 넘치던 당시의 박근혜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돋보인 시기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당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박근혜에 대한 기억 한 토막이다. 오랜 세월 집권당을 했던 한나라당은 일요일마다 주로 당직을 맡고 있는 현역의원이 기자실을 찾아 휴일 근무를 하는 기자들, 당직자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는 관행이 있었다. 일종의 언론인들에 대한 배려였다.
당일 점심을 책임졌던 박근혜는 기자들과 설렁탕집으로 가서 소주와 수육을 앞에 놓고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소신, 차기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 국민참여 경선의 필요성 등에 대해 시원시원하게 밝혔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의무적인 휴일 당직’에 나와 의례적인 식사와 관례적인 덕담을 하고 자리를 뜨던 것과 대조적으로 박근혜는 맨 마지막까지 남은 몇 명의 기자들 앞에서 아주 오랜 시간 자신의 주장을 역설했다. 흔히 말하는 ‘진정성’이 엿보이던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언론을 대할 때 타이밍과 강도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작심하듯 발언을 하는 스타일의 정치인이다. 이른바 ‘애드리브’보다는 밤새 꼼꼼히 준비한 메시지를 또박또박 전달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임기응변엔 능하지 못한 편이다. 그런 뒤엔 언론의 논조나 여론의 반향까지 세심하게 확인하는 게 ‘박근혜 스타일’이었다. 당연히 박근혜의 ‘준비된 한마디’는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에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박근혜는 ‘정치인의 발언과 언론의 메커니즘’을 익혀갔고, 박근혜 발언의 무게감은 여타 의원들의 그것과 차별화되어 갔다.
그때 박근혜에겐 분명히 정치개혁의 절실함과 동시에 뭔가 판이 바뀌지 않고선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비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