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박근혜⑦] 대처 수상이 롤모델···”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박근혜는 새마음갖기 운동본부 명예총재이던 지난 1979년 초 연설문 등을 모아 만든 ‘새마음의 길’이란 책을 펴낸 이후 정치권에 발을 들이기 전 일기 모음 형식의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을 출판했다. 1995년 여름엔 ‘박근혜 심경 고백 에세이’란 부제로 ‘내 마음의 여정’을 썼고, 1998년 국회의원이 된 직후엔 에세이집을 수정, 보완한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을 펴냈다. 그때그때 단상을 모아 모두 46편의 짧은 글로 구성된 이 책을 통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등장하기 이전 박근혜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수필집 맨 첫 편의 제목은 ‘인생은 추억 만들기’이며,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피자와 빈대떡’, ‘용서하되 신뢰할 수는 없다’, ‘깨끗한 마음의 위력’, ‘동동주와 초롱박’ 등의 글에 이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란 작은 책 한 페이지 반짜리 단상으로 책이 마무리됐다. 박근혜 수필집에 실린 ‘이름도 없었던 강아지’란 글이다. 그의 생명관, 인생관, 철학 등이 녹아 있는 듯하다.

‘이 땅에서 생을 누렸던 기간은 9년. 이름도 없이 살다간 강아지. 가고나니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다. ‘방울’은 개 목걸이라도 남겼었는데 이 강아지는 이름도 목걸이도 없이 활발하게 뛰어 놀고 먹성 좋게 달려들고 짖던 모습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만 한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는 인간과 강아지 사이에 결국 아무 구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은 한 가지를 남기게 된다. 크게든 작게든, 좋게든 나쁘게든, 그것은 다름 아닌 이름. 그 이름 안에 이 세상을 살다간 한 인간의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다.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름이란 바로 그 이름을 갖고 살았던 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자취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에 왔다가 업만을 갖고 간다고 하더니, 그리고 그것은 저승까지 어김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더니, 인간사의 모든 거품을 제거하고 그 진수를 직시할 때 – 그것은 바로 죽음인데 – 하루하루, 그리고 매 순간마다 지울 수 없이 뚜렷한 자국을 남기며 새겨져 가는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방울’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청와대에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자료사진에도 많이 등장하는 강아지의 이름이다. 박근혜의 글 밑바탕엔 생명에 대한 고뇌와 번민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인 박근혜의 초기 이력엔 예외 없이 문인협회 회원이란 경력이 포함돼 있다. 글쓰기와 문화유산 답사는 정치에 발을 들이기 전 박근혜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취미활동이었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사람들의 변절과 배신을 여러 차례 경험했던 박근혜는 주로 글쓰기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18년 동안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그는 ‘떨어진 권력’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에 수없이 상처 받았다.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아버지 시절 전직 장관은 인사를 건네는 박근혜를 외면했다. 박근혜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

‘새로운 변화와 개혁’

정치권에 발을 들인 지 15년, 처음 당 대표에 오른 지 8년, 그리고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지 5년. 수 없는 장애물을 하나씩 뛰고 넘어서 마지막 결승점을 앞뒀던 박근혜.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에 야권에선 필적할 후보가 눈에 띄지 않던 순탄한 상황에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2011년 오세훈 시장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어진 ‘디도스 사건’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무너져 내리면서 박근혜에게 예정에 없던 소임이 또 한 번 부여됐다. 모든 에너지를 응축해 2012년 총선부터 대선까지 약 10개월 간 총력을 쏟아붓겠다던 박근혜의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박근혜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 발표된 2011년 12월 19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취임식을 갖고 곧바로 위기에 빠진 당의 수습책 마련에 들어갔다.

김종인, 이상돈 등 당 밖의 인사들로 비대위를 꾸렸으나 2012년 새해 벽두 터져 나온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은 박근혜의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박근혜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당의 상징 색깔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면서 전면 쇄신에 들어갔다. 당의 정강, 정책에도 경제민주화 개념을 대폭 도입해 보수 일변도이던 당의 정체성을 확장해 나갔다. 당 안팎에선 부정적인 시선과 비판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연말 대선을 겨냥한 박근혜의 승부수는 그렇게 던져졌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은 박근혜가 33년 만에 청와대로 가는 길에 가로 놓인 최대, 최후의 시험대였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론, 경제난에 따른 민심 이반, 정권교체에 대한 당위성 등이 뭉쳐지면서 자칫 박근혜는 좌초할 위기에 놓였다. 여론도 여당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박근혜는 15년 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그랬듯이 밑바닥 민심부터 다시 불을 지폈고, 결국 새누리당은 152석 확보, 실질적인 총선 승리로 발을 잘못 디뎠다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늪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 51.55%와 48.02%. 짧게는 15년, 길게는 30여 년 세월 인내와 절제로 견뎌온 박근혜는 야권 주자 문재인에 108만 496표 차이로 승리했다.

당선이 확정된 뒤 그의 첫 일성은 “선거기간에 한 세 가지 약속, 즉 민생 대통령, 약속 대통령, 대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였다. 국립현충원 방명록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라고 썼다.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다.”는 게 대통령 당선인 박근혜의 첫 번째 대국민 메시지다.

60년 세월을 인내와 절제, 그리고 인고의 생을 살아온 박근혜. 정치에 뛰어든 이후에도 숱한 고비와 난관이 있었다.

그에게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준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 ‘탄핵역풍’의 위기에서 정치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천막당사와 2004년 17대 총선,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2007년 당내 대선 경선과 승복 연설, 그리고 2012년 19대 총선을 전후한 시련과 비대위 체제는 박근혜가 용케도 극복해낸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이후 줄곧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수상을 롤 모델로 삼아왔다. 스스로 ‘신념의 정치인’이라 부른 마거릿 대처는 뿌리 깊은 ‘영국병’을 치유한 정치 지도자로 평가 받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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