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박근혜⑤] 2004 노무현 탄핵 후폭풍서 한나라 구해···”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한나라당의 대선 자금 후폭풍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휘몰아치면서 당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 보이던 2004년 봄은 박근혜가 대한민국 정치무대의 주연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인물은 난세에 등장 한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때였다.
진통 끝에 최병렬 대표가 물러나고 한나라당은 3월 23일, 20여 일 남은 총선을 책임질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열었다. 한나라당은 와해 직전의 풍전등화 상태였다. 수도권 대부분의 지역구는 궤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박근혜, 홍사덕, 김문수, 박진, 권오을이 출마한 대표 경선은 정치권에 오래 몸담았고 직전 원내대표를 지낸 홍사덕의 조직력과 ‘개혁파’ 박근혜의 싸움이었다. 이때 전당대회장에서 박근혜의 한마디는 갈 길 잃은 당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저는 오늘,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을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대중연설 체질이 아닌 박근혜지만 짧은 이 한마디는 당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당 대표에 당선됐다. 한나라당 당원들은 난파 직전의 당을 살릴 적임자로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 한지 꼭 6년 만에 재선에 불과한 박근혜가 당을 책임지게 됐다.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고 당사로 첫 출근을 하는 날, 그는 당사에 발을 들이지 않은 채 한나라당 현판을 떼어 들고 여의도 중소기업전시관 부지에 마련한 ‘천막당사’로 향했다. 박 대표는 당사를 옮기던 그날 오후 명동성당과 조계사, 영락교회를 돌았다. 조계사 극락전에선 108배를 드렸다. 당 대표 경선에 이어 현판을 들고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 천막당사로 1킬로미터 남짓 걸어 이동했던 박근혜는 점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세 곳의 종교단체를 돌며 고해성사와 108배를 했으니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체력과 내구력 또한 범상치 않음을 입증시켰다. 박근혜의 이런 강단은 이후 여러 차례의 재보궐선거, 총선, 그리고 18대 대선 유세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런 강행군에도 그는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이다. 변함없는 얼굴 표정, 머리 모양새, 옷차림 등은 박근혜만의 특장점이라 인정하고 싶다.
3월 말이었지만 해질녘이면 여의도 광장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의 천막당사는 싸늘했다. 여기저기서 전기난로를 켜놓고 당무를 봤으며, 기자실의 천막을 걷고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바람이 몰아치면서 책상 위에 쌓아둔 각종 자료가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황사가 올 땐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근무했다. 화장실도 문제였다. 여기자들은 인근 건물의 화장실을 빌어써야 했고 당직자들과 기자들은 제대로 모여 앉을 곳이 없어 여기저기 서성이며 대화를 나누는 옹색한 광경이 빚어졌다. 주변에 막 들어서기 시작하던 커피 전문점들은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총선 직전 천막당사에서 기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취재원은 박근혜 신임 대표가 영입한 ‘선거의 책사(策士)’ 윤여준과 YS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서울대 교수 출신의 박세일이었다.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윤여준은 선거전략을, 박세일은 정책공약을 맡아 한나라당의 기사회생을 도왔으나 두 사람 모두 이후 박근혜와 소원해졌고 윤여준은 결국 반대편에서 18대 대선을 치렀다.
17대 총선에서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대표의 가장 든든한 정책브레인 역할을 했던 박세일은 세종시 문제를 놓고 박근혜와 의견대립을 보이다 끝내 한나라당을 떠났지만 18대 대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작은 힘을 보탰다. 박근혜와 결별한 윤여준은 최근 박근혜의 의사소통 방법과 의사결정 구조를 비판했지만 “박근혜의 절제력, 인내심, 그리고 헌신적인 태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천막당사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다. ‘원조 천막당사’는 1993년 2월 여의도가 아닌 광화문에 먼저 등장했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후보 김영삼에게 패배한 통일국민당 정주영이 정계은퇴 선언을 하면서 현대그룹 측이 당사를 강제로 폐쇄하자 김동길, 박철언, 유수호, 박구일 등의 인사들이 천막을 치고 임시로 가설된 천막당사를 사용했다. 새로 출범한 YS정부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하던 현대그룹 경영진은 서둘러 정치판에서 발을 빼기 위해 통일국민당과 절연을 한 셈이었다. 당사에서 내쫓긴 인사들은 한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 신세를 면치 못했다.
차이점이라면 통일국민당의 천막당사는 당 해체로 가는 길이었던 반면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기사회생의 전기가 됐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그래도 컨테이너를 들여 놓고 기반시설을 갖췄다면 통일국민당의 천막당사는 임시로 연결한 전선에 백열전구를 켜놓은 말 그대로 천막당사였다.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그렇게 4월 15일 총선을 치렀다. 50석도 장담할 수 없다던 당초 선거 판세였으나 박근혜의 위력이었는지, 아니면 천막당사의 힘이었는지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어 그래도 정부여당을 견제하고, 힘을 추스른 뒤 다음 대선에 한번 힘을 써볼 만한 의석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이런 예상 밖의 분전이 없었다면 3년 반이 지난 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인 대선 승리는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가 여의도 광장에 세웠던 천막당사는 결국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 자양분 역할을 한 셈이다. 또 박 대표 체제의 17대 총선에서 초선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진영, 이혜훈, 최경환, 유정복, 유기준, 곽성문, 김재원, 나경원 등은 이후 박근혜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