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박근혜②] “김정일 위원장, 시원시원한 인상이었다”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열 달 앞뒀던 2002년 2월 28일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5월 17일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근혜는 전격적인 평양 방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새 정당 창당 준비에 여념이 없던 박근혜는 주한 EU상공회의소 산하인 유럽·코리아 재단 주선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2002년 5월 11일 베이징을 경유해 김정일이 내준 특별기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박근혜는 5월 13일 백화원 영빈관을 찾아온 김정일을 만나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남북한 철도 연결, 금강산댐 안정성 공동조사 등을 논의했다. 박근혜는 당초 베이징을 경유해 항공기 편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나 김정일의 ‘먼 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개성과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귀경하시라’는 파격적 제안을 받아들여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박근혜는 대표로 있던 2004년 한나라당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과 나눈 대화에 대해 소상히 밝힌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 1시간 정도 따로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두 사람 모두 7·4남북공동성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었는데 아시다시피 공동성명은 박정희, 김일성 두 선대에 이뤄진 일이었으니까요. 성명 발표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무장공비가 남한에 내려오던 때였지만 냉전이 끝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7·4공동성명의 정신이 실천되지 않고 평화정착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을 제가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2세끼리 평화정착을 위해 힘써보자고 말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시원시원하게 말하면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와 국군포로 생사 확인, 남북한 철도 연결, 금강산댐 공동조사를 위한 실무협의기구 설치 등에 대해 합의했지요.”
속기사 한 명만 배석한 채 김정일과 단둘이 한 시간 동안 대화했던 박근혜는 그의 인상에 대해 거침없고 솔직한 화법과 태도를 보였다며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었다. 박근혜 자신이 집권할 경우 7·4공동성명의 주인공인 박정희, 김일성 두 사람의 2세들 사이에 뭔가 획기적인 남북공동 발전방안 같은 것이 추진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방북설명이었다.
박근혜는 김정일의 답방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김 위원장의 답방 의사는 확인했지만 김대중 정권 말기 DJ 아들들의 권력 스캔들이 잇따라 불거지고 있으니 적당한 때를 기다려 보자는 게 김정일의 의중이었다고 박근혜는 해석을 달았다. 기자들은 박근혜에게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에 접어들던 당시 박근혜는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였기에 그의 정상회담에 대한 견해는 주목할 만했다.
“남북정상회담은 국민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입장이 확고해야 합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간첩을 민주인사로 둔갑시키고, KAL기 사건을 재조사하고, 송두율 교수 같은 사람을 민주인사로 만드는 이런 것들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 정체성에 대해 국민이 혼란스럽고 불안해합니다.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면 국민들의 우려가 생기고,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기가 어려워집니다. 정체성을 확실히 한 뒤에 교류를 넓히고 대화를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국민들의 힘을 빠지게 하는 것이고, 그만큼 사회의 반감이 커집니다.”
박근혜와 김정일은 비록 10년의 나이차가 있지만 닮은 듯 다른 듯 첨예한 동서냉전의 동시대를 살아온 2세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남북한의 국정을 책임지는 시대가 도래할 때, 남북관계가 급진전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박근혜의 대권도전 실패와 2011년 김정일의 죽음으로 이런 기대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의 파트너는 이제 갓 서른이 된 3세 지도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로 바뀌어 있다.
선거전 과정에서 “대북정책도 진화해야 한다. 유화 아니면 강경이란 이분법적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화에 전제조건이 없고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면 김정은도 만날 수 있다.”고 한 박근혜식 대북정책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