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박근혜 ①] ‘한국병’ 치유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을까?

21세기 두 번째 10년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설렘과 불안 속에 맞은 ‘새천년’의 15년간 한국사회는 4명의 대통령과 한 번의 정권교체, 남북정상회담, 세월호 참사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시점에서 21세기의 문제를 풀 화두는 과연 무엇일까? <아시아엔>은 ‘공감’ ‘소통’ ‘공유’가 시대정신을 꿰뚫으며 해결방안의 하나라고 본다. 이에 <아시아엔>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은 후 방송사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기자를 거쳐 SBS CNBC 보도본부 부장을 지내고 채널인(Channel In) 대표로 있는 장규홍 기자가 만난 21세기 주요인물 인터뷰를 연재한다.

이 연재는 장규홍 대표가 2013년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서 낸 <공감 소통 공유-싸이에서 박근혜까지>를 업데이트해서 재구성했다. 첫번째 인물은 박근혜 대통령이며 7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박근혜 (朴槿惠) 대통령은 1952년 2월 대구 출생. 서울 성심여고,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7년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로 정치에 입문해 15, 16, 17, 18, 19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4년 ‘탄핵 정국’에서 당 대표, 2012년 19대 총선 직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난국 돌파의 주역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추락했던 지지율은 대외변수와 북한의 동향에 힘입어 극적인 반전을 보였다. 하지만 임기 절반이 지나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무기력했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기 2년반 동안 대형 돌발 악재가 잇따랐다고 해도 김영삼 정부의 문민 실현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정부의 경제위기 극복, 노무현 정부의 권위주의 혁파와 같은 업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 필자가 썼듯이 그가 적어도 ‘한국병’을 고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한줌도 안 되는 여론 지지도 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시 출마할 까닭이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또 최근 각종 매체에서 정파적, 정략적 이해타산으로 말의 성찬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평론가들의 평가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30년 세월을 와신상담해 청와대에 복귀한 그가 2년 남짓 남은 기간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국병 치유’에 몰입해주길 바란다.

흔쾌히 수용한 접전지 대구 달성 출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20여 일 만인 11월 21일 청와대를 나와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던 박근혜는 아주 오랜 세월 세상과 떨어져 살았다. 육영재단이나 박정희 대통령 추모사업을 하기도 했고, 대만의 문화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의 활동은 있었지만 그가 다시 세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불과 8일 앞둔 12월 10일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였다. 박근혜는 선거 막판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의 당선을 위해 뛰었으나 김대중과 김종필이 힘을 합친 ‘DJP 연합’에 정권을 내줬다.

박근혜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은 이듬해 1998년 4월 2일 치러진 보궐선거다. 부산 서구와 대구 달성, 경북 문경·예천, 경북 의성에서 치러진 재보선에서 박근혜는 당초 선친 박정희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문경·예천 지역에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초기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여당의 기세에 한나라당은 대구 달성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경북 문경·예천보다 더 다급했던 대구 달성에 박근혜의 출마를 요청했고, 박근혜는 고전이 예상되는 이 지역구 출마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구 달성에서 보궐선거가 열린 연유는 이렇다. 달성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서울시장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자민련 소속의 구자춘 의원 지역구였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달성은 터줏대감인 자민련 구자춘 의원과 집권여당 김석원 후보 간 용호상박의 맞대결을 벌일 최대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선거를 두 달 앞둔 그해 2월 구자춘 의원이 돌연 사망하면서 선거는 김석원 후보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김석원은 국회의원 당선 2년여 만에 쌍용차 매각 등으로 위기에 처한 쌍용그룹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내무부 장관이며, 10·26과 12·12 당시 치안행정의 최고책임자였던 구자춘에서 쌍용그룹 회장 김석원을 거쳐 대구 달성의 주인 자리가 박근혜에게 넘어온 것이다. 박근혜는 달성을 소중한 정치적 기반으로 해서 15년 뒤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대구 달성은 비록 한나라당의 텃밭이었지만 집권 이후 영남권 공략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가 이른바 ‘동진정책’을 추진하면서 ‘6공의 실세’라 불린 안기부 기획조정실장 출신의 엄삼탁을 내세웠다. DJ 정부는 대구에서 이길 경우 영남권의 교두보 마련이란 차원에서도 정치적 의미가 컸던 만큼 자금과 조직에서 전면지원에 나섰다. 박근혜는 초반 조직의 열세를 극복하고 6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엄삼탁을 누르고 당선됐다. 정치신인 박근혜는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뒤졌으나 바닥민심은 여론조사와 판이하게 흐르고 있었다. ‘선거의 여왕’은 이렇게 탄생됐다.

아버지의 고집을 이어 받았다는 인물평

2000년 16대 총선에서 엄삼탁과 다시 맞붙은 박근혜는 득표율 61.4% 대 38.6%로 재선에 성공하며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박근혜는 한 달 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 부총재 경선에서 최병렬에 이어 2위로 당선됐다. 국회의원 경력 2년에 불과한 ‘풋내기 박근혜’가 당내 세력이 만만치 않던 이부영, 하순봉, 강재섭, 박희태, 김진재 부총재들보다 표를 많이 얻어 파란을 일으켰다. 경선이 끝난 뒤 정치경력 20년의 한 다선의원은 ‘부총재 당선이 문제가 아니고 새파란 박근혜한테도 졌는데 정치를 계속해야 되나 창피스러워서 원…’이란 말이 공개 석상에서 나오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당연직 여성 부총재 자리 하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박근혜는 굳이 경선에 나서지 않아도 여성 몫의 부총재가 될 수 있었다. 대구경북지역 일부 인사는 표가 분산된다는 이유로 그의 출마를 반대했지만 박근혜는 뜻을 굽히지 않고 경선레이스를 완주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선 좀처럼 뜻을 접거나 타협하지 않는 박근혜의 특성이 정치무대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이때 한나라당 중진들 사이에선 ‘정치 초짜’ 정도로 만만히 봤던 박근혜에게 뜻밖의 고집과 강단이 있다는 사실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2000년 5월 월간 신동아의 15대 국회의원 인물사전에 실린 재선 국회의원 박근혜에 대한 인물평 한 대목이다.

‘격동의 한국 역사 현장에 있던 대통령의 딸에서 재선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차기 혹은 차차기에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과 역량을 지녔다는 평가도 나온다. 외모는 연약해 보이지만 속은 강인하고 정치적 소신이 뚜렷한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한나라당 부총재로서 남성에 밀리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여줬다.

아버지의 고집을 이어 받았다는 게 지배적인 인물평이다. 지역정가에서는 한국의 대처를 꿈꾸는 철의 여인으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평소 정치판을 정화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경선 과정에서 ‘민주화된 정당’, ‘정책 정당’, ‘정보화 정당’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박근혜는 이때부터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을 슬로건으로 ‘제왕적 총재 제도’를 없애는 데 앞장섰다. 박근혜의 주장은 당시 한나라당으로선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 총재를 둘러싼 두터운 인의 장막을 뚫기에 힘이 부쳤던 박근혜는 한나라당 안에서의 개혁에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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