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광복·민주공화국’은 청년 윤보선의 한결같은 초심이었다

1950년대의 윤보선 전 대통령

이부영 전 의원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탄신 120주기 추모사?

해위(海萎) 윤보선(尹普善, 1897~1990년) 전 대통령의 탄신 120주기 추모예배와 추모식이 26일 오후 5시 안국동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원장 김학준) 주최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김학준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장·김원기 전 국회의장·이종찬 전 국정원장·현승일 16대 국회의원·송철원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김도현 씨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부영 전 의원은 윤 전 대통령의 청년시절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추모사를 했다. 이 전 의원은 “해위의 청년시절 상해독립운동 참여와 독립운동 의식, 그리고 1930년대 귀국 후 대외활동을 끊고 은둔 칩거생활을 한 것 등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게 없다”며 “조선조 최고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온건개혁 의회주의자였던 그의 삶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해위는 일본 문제와 독재에 대해 추상같은 자세를 보였다”며 “그를 단순히 구정치인으로 몰아세우는 시각에 대해 수정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추모사 요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아시아엔>은 ‘청년 윤보선선생의 한결같은 초심’이란 주제의 이 전 의원 추모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해위 윤보선 대통령 탄신 120주기를 맞았다. 또한 서거하신 지 벌써 27주기가 지났다. 큰 어른이 떠나신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곁에 계실 때에는 얼마나 고맙고 큰 어른인 줄 모르다가 떠나신 뒤에야 문득 자신들의 무지와 왜소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해위의 삶은 나라의 운명이 가장 험난한 한 세기를 온전히 보시고 겪으시며 살아내셨다. 해평 윤씨 가문은 개화 사대부가로서의 책임감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윤리의식으로 흔들리는 나라와 사회를 지탱해야 한다는 가훈을 지녔다.

해위께서는 나라가 쓰러지기 직전에 태어나시어 망국의 통분을 청년기에 맞으시었다. 가족을 고국에 남겨놓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셨고 굳게 일제치하를 버티어 내셨으며 광복되자 새로운 민주조국을 일으켜 세우고자 정치에 투신하셨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와의 싸움에서도 늘 큰 언덕이 되어 중심에 서셨다. 해위 선생의 한결같은 견결함에는 청년시대에 세웠던 조국의 광복과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초심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었다.

한국을 침탈한 일본이 한국을 철저히 노예화하면서 점차 중국 쪽으로 침략의 판도를 넓혀가려는 의도를 아시게 되었다. 그래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신속히 신장시키는 일본을 알기 위해서 일본에 유학해야 한다는 선친의 권고로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유학하셨지만 일본의 천황 이데올로기와 공격적 민족주의 등 그 근대사상의 정체를 알고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오셨다. 즉 가장 강한 자인 천황은 절대성을 가지며 문명의 우등국인 일본이 열등국 한국을 병합하는 것은 역사의 순리요 귀결이라는 일본의 근대사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으셨다. 해위의 반일이 체질화된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해위께서는 중국 신해혁명의 경우처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모색하셨다. 중국으로 가겠다는 일념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으셨다. 선친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목사가 되어 돌아와서 나라 찾는 길을 모색하라고 권하셨다.

일본제국주의라는 치욕과 압박의 현실을 혁명으로 바꾸고 싶으셨던 것이다. 1917년 여름 당시 상해교민단장으로 한국 청년의 구미유학에 힘쓰고 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셨다. 해위께서는 몽양 선생을 찾아가셨다. 선친에게는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몽양을 따라 떠나셨다. 상해에 도착하자 먼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였던 신규식 선생을 찾아가셨다. 그 분은 선친의 친구였고 해위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보살피셨다. 해위께서는 당연히 신규식 선생이 조직하고 이미 박은식 김규식 여운형 선생들께서 가입해있던 비밀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들어가셨다.

상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신규식 선생이 주도한 동제사와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주체가 되었다. 해위께서는 23세에 임시정부 의정원 최연소 의원이 되셨다.

당시 해위께서는 신규식 선생이 주도하던 주간지 <진단>의 발행을 돕고 계셨는데 이승만 박사와 신규식선생의 지시로 독립운동자금 3000원이라는 거금을 국내에서 들여오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하셨다. 동생 완선씨가 국내로 잠입해서 가져온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오셨다. 선친께서는 해위께서 미국유학을 떠나지 않고 상해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금을 보내주셨다. 아들처럼 아끼던 해위에게 신규식 선생은 앞으로 조국의 기둥으로 일할 미래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을 강권하셨다.

이범석 장군에게도 장차 독립군을 이끌 지도자가 되도록 운남 군관학교에서 수학하도록 보내셨다. 에딘버러대학 수학 6년이 되는 1930년 문학사와 석사를 이수하고 졸업하셨다. 졸업한 뒤 2년 동안 귀국 하시지 않고 영국에 남아계셨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모색하셨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빨리 귀국할 것을 재촉하셨다. 귀국할 경우 상해 독립운동 경력을 파악하고 있는 일본 경찰이 그대로 넘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귀국한 해위는 일체 대외활동 하지 않은 채 안국동에 칩거하셨다. 칩거는 당시 국내에 살아가고 있던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해위께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고 계셨다.

1945년 해방은 갑자기 찾아왔다. 이미 필연으로 다가왔지만 일제의 검은 장막 안에 갇힌 조선반도 안에서는 바로 앞에 다가온 해방이 보이지 않았다.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분단의 슬픔이 내리 덮쳤다. 국내의 정치세력들도 미래를 내다보는 각각 다른 눈들을 가지고 있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세력들도 출신지역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가지고 국내의 분열에 기름을 부었다. 해방 직후 찬탁-반탁으로 갈려 갈등하던 정치권은 좌와 우로 갈려 대립했다.

해위께서는 광복된 조국에서 급진적 노선보다는 점진적 개혁의 길, 민주주의의 길을 택해 한국민주당에 가담했다. 그러나 한민당 정치도정에서도 이승만 박사와 상해독립운동 당시의 동지 이범석 장군의 일민주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일의 나치즘을 핵심으로 하는 안호상 박사의 국수적 일민주의였고 해위께서는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는 점진적이지만 민의를 수렴-반영하는 영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실시되어야한다고 확신했다. 일제의 잔재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나라를 세워야한다는 소신은 상해 청년독립운동가 시절부터의 소신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강화된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독재는 전후의 피폐한 민생을 외면하면서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하는 부정부패 정권을 유지했다. 민주당은 대안정당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했으며 해위께서도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된 중진 야당 정치인으로서 자제와 품위를 지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민주당은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와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잇따라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선거 도중에 서거하는 이변을 겪어야했다. 야당의 대선후보가 없는 조건에서도 부통령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러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자 4.19민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4월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권력구조를 채택하여 양원제 국회에서 해위 윤보선 선생을 압도적 다수로 내각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권력은 장면 내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록 상징적 국가원수였지만 해위의 위상은 새로운 공화국에서 꼭 필요한 ‘친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독립운동 참여’라는 덕목에 합당한 지도자였다.

해위는 온유함, 점진적 민주주의 실현, 책임감을 갖춘 품격 있는 국가지도자로 부각됐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군부집단이 등장하자 해위 선생에게는 다시 모진 풍랑이 몰아쳤다. 4월 민주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채 한해도 넘기기도 전에 군부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집권의 당사자인 장면 국무총리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상징적 국가원수인 해위께서는 책임지고 사태수습에 나서야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군부쿠데타는 용납될 수 없는 반역행위였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전략의 일환으로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해위의 선택은 달리 없었다. 해위는 물러나셨다. 그리고 길고긴 야당의 길을 통해 군부독재를 극복하는 민주회복의 장정에 나서셨다.

박정희 친일군부정권의 굴욕적 한일협정 체결음모에 대항해서 벌이신 투쟁과 유신독재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에 필자는 주목한다. 1964년 6.3항쟁을 계기로 한일협정타결을 강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전 국민의 거국적 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의 뒷거래를 통한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용납할 수 없었던 해위께서는 선명야당의 기치 아래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을 이끌고 계셨다. 한일협정 체결파동은 월남파병 문제와 겹치면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두 문제 모두 박정희 정권의 의도대로 국회를 통과했다.

해위 선생께서는 의원직을 사퇴하시고 안국동 자택에서 단식까지 하셨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삼선개헌 유신독재로 치닫자 해위께서는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반 박정희 투쟁의 중심에 서셨다.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박정희 군사법정과 일반법정에 불려나가 서셔야했다. 해위께서는 길고긴 박정희 독재 기간 동안 민주화운동의 큰 울타리 방파제가 되어주셨다.

국가원로로서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계셨다. 청년시대에 굳히신 신념 그대로였다.

개인적인 몇 가지 소회를 밝히려한다. 1974~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운동을 벌였을 때, 해위께서는 동아일보 사측과의 오랜 인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이 사측과 야합하여 자유언론운동 기자들을 해직하고 감옥에 보내고 취업도 못하게 하자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셨다.

언론인들이 폭력배들에게 매 맞고 쫓겨나올 때, 동아일보 사옥 밖에서 공덕귀 여사, 천관우 선생, 정일형-이태영 선생 부부가 걱정해주고 지켜봐주시던 정경을 잊을 수 없다. 필자 자신이 감옥에 가있을 때 공덕귀 여사가 명절 때 되면 보내주시던 영치금을 받고 큰 격려를 받았다.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되고 군부측이 최규하 총리를 대통령으로 장충체육관에서 유신헌법에 따라?다시 선출하려 하자 재야인사들은 그 부당성를 지적하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우리 모두의 울타리였던 해위 선생의 안국동 자택에서 1979년 11월 10일 발표했다. 유신체제를 다시 연장하겠다는 집권세력의 포고에 “안 된다”는 해위 선생을 비롯한 민주세력의 의사를 분명히 하자는 성명이었다. 김찬국 서남동 이우정 백낙청 등 30명 가량의 재야민주인사들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모두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구치감에 갇혀 며칠 함께 고생했다. 아직 신군부가 집권하기 전이라 정승화 계엄사령부는 필자 한 명만 구속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로 넘겨져 곤욕을 치러야했다.

이렇게 해위 선생께서는 상해독립운동 청년시절 세우셨던 자주광복과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청년 윤보선의 한결같은 초심’을 지켜오셨다.

해위 윤보선 선생님, 조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분단 속에 핵전쟁으로 가느냐는 여부를 놓고 초긴장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해위 영령이시여, 다른 모든 선열들과 함께 한반도에 평화와 분단극복의 지혜를 저희들이 깨우치도록 도와주소서!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이부영 上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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