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긴장완화 해법②] 대북 봉쇄·제재로 북핵폐기 가능할까?

[아시아엔=이부영 전 국회의원, 2015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조직위원장] 최근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한반도 사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1970년대 초 관계개선에 성공했던 미중 관계는 중국의 급부상과 역내 세력관계의 변천에 따라 다시 대결로 돌아섰다. 미중 간 갈등은 예외 없이 한반도에 굴절되어 북핵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한반도는 동북아 전환기마다 강대국들의 전략 갈등이 집약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북핵을 둘러싼 북미 갈등은 중미 갈등으로 비화되고 한미와 중국의 갈등을 빚는 사드 정국까지 불러오고 있다. 결국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동아시아에는 냉전시기로 회귀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미일 동맹과 북핵 제재에 열중하면서 아직 북핵 방치 정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제기한 단계 즉 북핵 동결과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빅딜이라는 첫 단계, 그리고 북핵 폐기와 평화협정을 맞바꾸는 두번째 단계를 추진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상당 기간 진통을 겪으면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4차핵실험과 제7차당대회 이후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한국과 일본에 핵도미노 경향을 비롯한 국지전으로 한반도를 몰아넣을 우려도 있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선거에도 의외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로 갈등을 빚는 정책에서 벗어나 긴장국면을 통제 가능하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대북한 봉쇄와 제재로 북핵폐기 가능한가?

<중앙일보>는 2016년 1월 8일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그간 북미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북핵개발이 중단됐었다.”

북핵은 제동장치 없는 폭주기관차가 아니라 협상을 통해 정지 가능한 보통기관차였다. 북핵 공방을 간추리면, 첫째 북한의 제1차 선비핵화(1994.11~2002.12), 둘째 북한의 제2차 선비핵화(2007.7~2009.4), 셋째 북한의 선비핵화 거부와 미국의 협상거부(2010.12 이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제1차 선비핵화는 무려 8년 동안 지속됐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핵시설과 물질을 동결?폐기하는 조건으로 원자로?중유?완전한 관계정상화를 제공키로 하여 북한은 11월 핵활동 동결을 선언하고 NPT에 복귀했다. 그러나 경수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고 관계정상화 협상도 거부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10월 제2제네바합의로 선비핵화를 유지하는데 성과를 거두고 클린턴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선비핵화 합의는 다시 깨졌다. 북한은 다시 2002년 핵시설 봉인을 풀고 핵활동 재개에 들어가 2003년 1월 다시 NPT를 탈퇴했다. 북한은 결국 2005년 2월 핵무기보유를 선언했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이 다시 협상에 나와 북미 사이에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나왔다. 그 내용은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 △북미 간 관계정상화 △경제협력과 에너지 지원 등이다.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4조에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 협상, 5조에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한다고 했다. 안전장치로는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 △남?북?미?중이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체제 협상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으로 묶어 약속이행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 하루 뒤에 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예금계좌를 동결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시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으로 응수했다. 미국은 그동안 거부해오던 양자협상에 응해 2007년 2월 2.13합의를 도출했다. 내용은 △시설 봉인?폐쇄 및 IAEA 사찰단 복귀 △북미 전면 외교관계 협상 및 대테러지원국 해제 개시 △에너지 긴급 지원 등이었다. 북한은 앞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 2단계 조치 즉 영변 냉각탑 폭파 등 핵시설 불능화, 핵프로그램 신고를 모두 이행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2단계 조치가 부여한 의무사항 즉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 교역법 적용대상 삭제, 중유 95만 톤 제공,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논의 진전 등을 이행했는가. 미국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동시행동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선비핵화 이행에 대해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5년 2월의 핵보유선언, 2006년 10월의 1차 핵실험, 2008년 8월의 1차 인공위성 발사 등 북한의 강력한 군사력 시위는 어김없이 미국을 협상으로 나서도록 했다. 부시에 이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양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미국의 약속이행이 지켜지지 않아 더 이상 선비핵화가 북한에게 수용되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평화협정 체결논의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단호히 협상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북핵공방의 제3시기, 즉 ‘북한의 선비핵화 거부와 미국의 협상거부’ 시기가 도래했다.

클린턴이나 부시에게도 북핵의 저지는 국익과 직결됐다.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을 감수하면서도 왜 협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한 곳에 있다. 평화체제 수립의 전제는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 종전선언이 있으면 유엔군사령부는 해체된다.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기득권의 큰 부분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유엔군사령부의 후방기지인 주일 미군기지들도 존립근거를 잃는다. 동북아시아 전반에 대한 군사적 장악이 흔들린다.

“이제부터라도 외교다운 외교를 해야 한다. 그것은 북한 붕괴론의 환상에서 깨어나 북한의 구미를 당길 만한 카드를 갖고 평양과 워싱턴이 대타협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과 북미 관계정상화를 북한의 핵포기와 맞바꾸는 ‘큰 흥정(그랜드 바겐)’을 추구하되 일단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하고 협상하는 동안에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 2016.1.26)

간단하지만 북핵과 관련한 위의 과정을 살펴보면 봉쇄와 제재로 해결될 과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북핵 폐기와 동전의 양면관계인 평화협정의 체결은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존재여부를 결정짓는 일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유지라는 전략적 이익에 관련된 핵심 사안이다. 미군 감축과 철수, 기지폐쇄는 미 군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칠 문제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은 먼저 북핵 동결과 한미연합군사훈련 중지라는 빅딜의 첫 단계를 마무리지은 다음 본격적으로 다뤄질 사안이다. 오랜 진통을 겪으면서 추진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봉쇄와 제재는 북핵의 고도화를 저지하지 못하고 촉진시킬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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