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이길여 가천대총장 ②] 아버지 돌연사 겪고 의사 꿈···가난한 임산부의 문전성시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그녀의 나이 열네 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뜬 아버지를 보면서 의사가 되겠다는 이길여의 결심은 더욱 단단해진다. 아버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자 며칠 앓고 나면 감기가 떨어질 거라던 어른들이 허둥댔지만 시골에서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그 당시엔 그렇게 병명도, 원인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길여 : “아버지가 처음엔 감기인줄 알고 며칠 누웠다 일어나실 거라고 다들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데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됐던 것 같습니다.
한 열흘 앓으시다가 시골에서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일본에 계시던 친척이 하시는 말씀이 일본 같았으면 치료가 가능했고, 죽을 병이 아닌데 안타깝다고 하는 말을 듣고선 커서 꼭 의사가 돼야겠다, 그래서 병들고 다친 사람들을 꼭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지요. 이후 단 한 번도 의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 적십자병원과 고향 군산의 도립병원을 거친 이길여는 터전을 인천으로 옮겨 자성의원이란 작은 산부인과를 연다. 이길여는 열악한 의료 환경에 한계를 느낀 끝에 1964년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다. 그곳의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Mary Emmaculate Hospital)과 퀸스 종합병원(Queen’s Hospital Center)에서 일하던 시절은 이길여에게 ‘큰 의사’가 되기 위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된 시기이다. 국내에선 주사 바늘조차 구하기 어려워 재활용하던 시절, 미국의 선진 의료 환경은 서른을 갓 넘긴 의사 이길여에게 신세계를 열어 준다.
기자 : “미국 유학기간이 이 총장에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전환점이 됐던 것 같습니다.”
이길여 : “그때 미국에선 이미 병을 고치는 단계를 넘어서 병을 예방하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의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사고가 확 달라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의료봉사를 하고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요. 한국에 돌아가서도 꼭 그런 방식의 의료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그때만 해도 공부를 마친 뒤 미국에 잔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저는 미련 없이 의료후진국인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됐지요.”
귀국 후 이길여의 산부인과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보증금이 없으면 입원조차 불가능하던 시절, 이길여는 대한민국 최초로 보증금 없이 산모들을 받았다. 치료를 받다가 종적을 감추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느 병원이나 보증금을 받고 환자를 입원시키던 시절이었다. 의사 이길여는 밤잠을 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곡식이나 채소, 생선을 이고 와서 병원비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길여 총장은 이 시절 단 하루도 네 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면서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한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려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