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이길여 가천대총장⑤] 이어령 장관 “청진기에 스민 박애정신” 극찬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이길여의 의사 생활 50여 년 동안 3대째 신생아를 받아준 집안도 있고 네쌍둥이를 받아 네 자매가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들어온 진귀한 인연도 있었다. 2010년 초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길병원에 간호사로 들어온 네쌍둥이 황설, 슬, 밀, 솔은 20여 년 전인 1989년 의사 이길여가 받아준 신생아였다.

이길여 : “네쌍둥이의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의 탄광노동자였습니다. 출산을 위해 친정인 인천에 와있던 산모가 예정일이 되기 전에 우리 병원에 실려 왔지요. 양수가 터진 상태였는데 새벽 3시에 산모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제가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당초 태백의 산부인과에선 전체 출산에서 확률이 70만분의 1일에 불과한 네쌍둥이 분만은 위험하니 한 명만 낳을 것을 산모에게 권유했다고 합니다. 단칸방에 살던 네쌍둥이 부모는 수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출산을 한다고 해도 아이들을 키우기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저는 네 아이의 대학입학금과 등록금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들 부모는 이후에도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어려운 형편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네쌍둥이가 모두 간호학과를 졸업했고, 저는 이들을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받아들였습니다. 내 손으로 받았던 네쌍둥이가 모두 간호학을 공부하고 자기들이 태어난 길병원에 간호사로 들어와 일한다는 것에 한없는 보람을 느꼈지요.”

이 땅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던 시절. 한국을 방문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귀국길에 심장병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는 장면을 보면서 이길여는 남다른 결심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30대 후반이 됐을 심장병 어린이들이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며 ‘산토끼’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아직도 자료화면에 생생히 남아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해 가을 소련 사할린 상공에서 벌어진 KAL기 격추사건과 바로 한 달 뒤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을 당한 한국을 방문해 위로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자 : “1983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에 돌아가면서 우리 심장병 어린이들을 데리고 가는 장면은 훗날 이 총장께서 저개발국가의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무료수술을 해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과정을 말씀해주시죠.”

이길여 :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비행기에 오르면서 그들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우리나라 심장병 어린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동요를 부르는 장면을 뉴스 화면으로 봤지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수준, 의사들이 빨리 발전해서 저런 어린이들을 이 땅에서 돌봐줘야겠다. 더 나아가 우리도 어려운 나라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데려다 치료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1991년 당시 아직 공산국가였던 베트남의 24살짜리 젊은 애기엄마를 데려다 심장병 수술을 해줬지요. 처음엔 다 죽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우리 의료진으로부터 수술을 받고 나중에 완전히 회복된 얼굴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한 게 1983년에 우리가 가졌던 그런 고마운 마음을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도 가질 수 있겠구나, 그런 마음을 세계에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베트남,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등의 나라들에서 일 년에 몇 백 명씩 아이들을 데려다 20년째 수술을 해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농이었던 이길여의 집엔 늘 밥을 굶은 걸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길여의 어머니는 소반에 국과 밥을 차려 어린 이길여에게 나르게 하면서 ‘비록 걸인이라도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은 소홀히 하지 말아야한다’는 가르침을 줬다고 한다.

그런 때문이었는지 의사가 된 이길여는 1960년대부터 통통배에 간호사와 미용사를 태우고 서해 낙도를 돌며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이후 여성을 위한 무료 자궁암 검진을 실시했고, 1980년대엔 오지와 다름없던 경기도 양평군, 강원도 철원군에 길병원을 세워 매년 적자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의료봉사에 나섰다. 1995년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백령도 적십자병원을 떠맡아 2001년까지 백령길병원을 운영하며 섬 주민들을 돌봤다. 자비를 들여 섬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다 국가기관에 그 의무를 넘겨줄 땐 벅찬 가슴으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선생은 의사 이길여에게 ‘청진기에 스민 박애정신’이란 표현으로 경외감을 표했다. 어느 겨울날 산모를 돌보며 차가워진 청진기를 가슴에 품었다가 진료를 했다는 이길여. ‘건국 이후 가장 크게 성공한 자수성가형 여성 CEO’란 평가를 받고 있는 이길여 총장은 이런 말을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누구나 살다 보면 위기를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삶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위기 앞에 좌절하고 포기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저는 위기 때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맞서왔습니다. 모험과 도전에 익숙해진 탓인지 저는 위기를 즐기며 기회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확신이 서면 난관을 무릅쓰고 설득하고 또 돌파하면서 헤쳐 나왔습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수록 힘차게 돌아가듯이 역경과 저항은 저에게 용기와 도전정신을 불어 넣어줬습니다. 저는 의료인으로서 환자를 따뜻하게 돌보고 또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사회와 국가, 인류에 기여할 인재로 길러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어왔습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그 산을 넘을 것입니다.”(이길여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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