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박근혜⑥] 동교동 김대중 자택 찾아 “딸로서 사과드린다”

계영배와 절제의 미학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당 대표가 된 뒤 박근혜는 기자들과 접촉의 범위를 넓혀 갔다. 초재선 의원 시절 주로 야당 출입 ‘말진’ 기자들을 상대하다가 부총재를 하면서 중견기자들이 담당하던 박근혜는 이제 대표로서 주로 야당 출입 고참 반장들의 취재원이 됐다.

지금은 박근혜의 서울 삼성동 자택이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대변인이나 대표 비서실장조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2004년 늦은 가을 박근혜는 한나라당 출입 반장들을 자택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1층에 응접실과 식당, 접견실이 있고 2층에 서재와 침실이 있는데 가구나 살림살이가 단조롭다 싶을 정도로 치장이 없었다. 간혹 눈에 띄는 것은 선대(先代)부터 사용했을 법한 낡고 오래된 물건들이었다. 가전제품 중엔 20년은 족히 됐을 법한 ‘골드스타’ 마크의 금성사 제품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저녁식사가 시작되면서 박근혜는 기자들에게 자기로 만든 계영배(戒盈杯)에 술을 따라주며 계영배의 구조와 내력에 대해 설명했다.

박근혜 : “계영배는 술을 가득 채우면 잔 밑의 구멍으로 술이 흘러내립니다. 차서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우리 조상들이 계영배를 빚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면 취하지도 않고요….”

박근혜가 얼마나 절제를 중시하는 사람인가 새삼 확인시킨 장면이었다. 박근혜의 언행이나 행동거지를 보면서 오랜 세월 내적 성숙을 거치며 단련이 됐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적막한 주택에서 긴 세월을 혼자 보내야만 했던 그의 정신세계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던 게 솔직한 기자의 심정이었다. 내공의 단련 이면에 사회와의 단절, 가족과의 단절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 저녁자리에선 박근혜의 애창곡이 솔리드의 ‘천생연분’과 거북이의 ‘빙고’라는 점, 간혹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빠르고 신나는 템포의 두 곡을 부른다는 말도 들려줬다. 예전엔 테니스와 탁구를 즐기기도 했지만 최근엔 자택에서 단전호흡과 국선도, 요가, 팔굽혀펴기 등으로 건강을 챙긴다는 말도 했다. 또 당시만 해도 널리 확산되지 않았던 ‘싸이 1촌’에 열성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즉 SNS의 ‘얼리 어답터’라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이 SNS는 정치권에서 박근혜가 원조 격으로 이후 기자들이 비중 있는 정치인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들락거리며 가십성 기사를 발굴해 내는 매개체로 발전했다.

예전 정치부 기자들이 새벽같이 정치인들의 집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함께하면서 기사를 쓰던 관행이 SNS로 옮겨간 것이다. 독신의 여성 정치인 박근혜는 대면접촉보다 효과적인 SNS를 활용했고, 이런 점에서 그는 취재관행에 변화를 가져온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실제로 그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펴기도 했다. 박근혜는 자신의 주량이 소주 넉 잔, 폭탄주 한 잔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회식자리에선 친박계에서 술이 세다는 몇몇 의원들이 ‘흑기사’ 역할을 해준다는 말도 했다. 공교롭게도 ‘흑기사’ 몇 사람은 후에 술로 인한 구설수에 올라 곤욕을 치렀다.

우리 정치사에서 의미 있었던 한 장면은 2004년 8월 12일 박근혜와 김대중의 만남이었다. 난파 직전의 한나라당 대표에 올라 총선에서 선전한 뒤 다음 대권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던 박근혜는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해 김 전 대통령과 비공개 대화를 나눴다.

박근혜 :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김대중 : “과거의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내가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박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박근혜 : “한나라당도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미래지향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남북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하겠습니다.”

김대중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야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박 대표가 2002년에 북한에 다녀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또 가도록 하세요.”

대한민국 정치사에선 ‘통 큰’ 화합과 ‘뒤끝 없는’ 포옹의 장면이 좀처럼 연출되지 않았다. 비중 있는 정치인들이 대부분 구원(舊怨)을 풀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거나 중대사를 앞두고 급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정치사의 가닥이 꼬이고 매듭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은 그런 ‘스케일 있는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결국 다시 포옹하지 못했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아직도 반목과 배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역사의 매듭을 한 번은 풀었어야 할 박정희, 김일성, 김정일 등이 역사적 역할과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떴으며, 해공(海公) 신익희, 유석(維石) 조병옥 등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대사를 눈앞에 두고 간발의 차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해공이나 유석이 대업을 앞두고 눈감지 않았다면 4·19 꽃다운 청춘들의 희생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발전에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과 박근혜의 짧은 만남에 이은 몇 마디 화해와 용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DJ가 눈을 감기 전 박근혜가 동교동을 찾아 이런 화합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박근혜에겐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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