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홍의 인물탐구 넥센타이어 강병중③] 화물운수업서 흥아·우성타이어 합병 넥센으로 도약
[아시아엔=장규홍 채널인(Channel In) 대표, 전 SBS CNBC 보도본부 부장] 일제강점기인 193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강병중은 이 무렵 성장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고단한 유년, 청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고향 진주를 떠나 마산에서 마산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동아대학을 다니며 어렵게 학사모를 쓰게 된다. 강병중은 후일 대법관에 오른 조무제 동아대 석좌교수 등과 대학수업을 함께 들으며 법관의 꿈을 키우기도 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시의 꿈을 접고 운수업의 길에 들어선다.
1967년 그는 화물운수회사인 옥정산업을 만든다. 일본과 미국에서 폐차 직전 단계의 중고차를 들여와 수리해 판매하거나 직접 운영하는 형태였다. 초기 운수업을 하면서 최대 골칫거리는 수명이 다 된 타이어의 잦은 펑크였다. 강병중은 손수 재생타이어를 만들었고 때마침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화물차 등 자동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73년엔 흥아타이어공업을 세워 제2의 도약기를 맞았다.
강병중의 사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IMF 외환위기 직후였다. 만년 후발업체에 머물던 강 회장의 흥아타이어는 당시 기술력에서 앞서 있던 우성타이어를 인수해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두 회사를 합병한 뒤 회사 이름을 넥센타이어로 바꾸면서 해외시장에서의 호응은 커져만 갔다. 회사 개명의 덕분이었는지 넥센으로 브랜드를 통일한 직후부터 그의 타이어 사업은 날개를 단 듯 성장가도를 달렸다.
강병중 : “두 회사를 합병한 다음에 회사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내 공모를 했는데 넥스트 센추리, 즉 다음 세기를 뜻하는 넥센이란 공모작이 올라왔습니다. 마침 그 무렵이 새천년을 맞이할 때이고, 천년은 몰라도 백 년은 가는 그런 기업을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넥센이란 회사명을 채택했습니다.”
우성타이어를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바꾼 지 10년 만에 넥센타이어의 매출은 2천억 원에서 1조 원으로 초고속성장을 이룬다. 현재 130여 개 나라에 타이어를 수출하고 있는 강 회장은 해외딜러들로부터 ‘타이어 강(Tire Kang)’으로 불린다. 그는 미국과 독일, 중국에 판매 법인을 설립한 데 이어 영국과 캐나다, 이탈리아, 호주, 러시아 등 자동차 수요가 많은 나라들에 잇따라 해외지점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차, 기아차 등 한국산 완성차 브랜드의 세계시장 돌풍에 이어 타이어 업계에선 후발주자인 넥센의 거센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