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정의란 무엇인가···조봉암의 경우
중학 시절이다. 교사 중에는 부잣집 아이들의 과외공부를 지도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중간고사를 치르기 전날이었다. 나는 같은 반 친구와 저녁에 교실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공부는 하지 않고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잠시 나갔다가 오더니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 친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자랑하듯 내게 말했다.
“이건 말이야 내일 치를 시험문제의 답만 적은 거야. 이대로 적으면 백점이야. 선생한테 과외하는 아이를 꼬셔서 빼내 왔어.”
다음날 시험에서 그게 사실인 걸 확인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를 열 번도 더 읽은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안지만 빼내온 아이들은 노력 없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 기말시험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항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험 전에 유출된 답안지를 구했다. 시험 전에 그게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될 것 같았다. 당시 중학생인 나로서는 카메라도 없고 있다고 해도 날짜를 입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전날 운동장 철봉대 옆에서 놀던 고등학생에게 사전에 유출된 답안지를 보이면서 나중에 증언을 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부탁했다. 그 고등학생이 내 얘기를 듣고는 난감을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개입하기 싫은데”
불의를 외면하려는 그가 이상해 보였다. 직접 따지기로 했다. 나는 답안지를 유출한 그 선생을 찾아갔다. 사전에 유출된 답안지를 보이면서 말했다.
“선생님이 이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얼마 후였다. 선생님이 방과 후에 숙직실 뒤로 오라고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학교는 적막강산이었다. 나는 숙직실 뒤 작은 공터로 갔다. 선생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나의 약점을 잡았다 이거지?”
선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턱으로 바로 주먹을 날렸다. 또 다시 연속적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날 나는 떡이 되도록 폭행을 당했다. 내가 주장한 정의는 그렇게 뭉개졌다.
얼마 전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씨의 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고등학생 시절 길을 지나가다가 한 여학생이 불량배들에게 희롱당하는 걸 봤다. 그는 불량배들에게 가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다. 순간 그에게 주먹이 날아왔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고 코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회고록에서 힘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고지가 바로 앞일 때였다. 갑자기 그의 아들 병역비리 문제가 언론에 불거졌다. 그를 파괴하기 위한 모략공작이었다. 검찰은 그의 결백을 알면서도 일부러 진실발표를 늦추었다. 결국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
예전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선생은 득표율이 무섭게 치고 올라갔다. 갑자기 그는 북한의 노선을 동조했다는 이유로 구속이 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북한과의 평화통일을 주장했었다. 기소된 내용은 그의 주장이 김일성의 주장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평화통일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정의라면 그걸 누가 주장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가 하는 소리를 외면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의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악인이 날뛰고 의인이 모략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상징이자 은유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원래가 정의를 증오하고 죄악이 판치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실행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정의의 세상으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의의 주장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정의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저항을 만나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로운가 해로운가, 힘이 있는가 없는가는 알 바 아니다. 세상이 변했다.
모기소리만한 인터넷상 정의의 글들도 수백만 수천만이 모이면 지축을 흔드는 엄청난 굉음을 변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됐다. 우리는 정의를 주장해야 한다. 대담하게 주장해야 한다. 세상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개의할 것 없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