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강한 사람이 강한게 아니고 약한 사람이 약한 게 아니다

디케의 저울

승승장구하는 한 재벌회장의 피해자를 의뢰인으로 맡게 됐다. 확인을 해 보니까 피해자의 말이 맞았다. 그를 죄인으로 확정한 대법관들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확신이 있었다. 법관들은 기록만 봤다. 그리고 법리의 프리즘을 통해 굴곡된 사실만 봤을 뿐이다. 나는 직접 얼굴을 마주대고 내 눈으로 현장을 확인했다.

재벌회장이 증인들과 증거를 조작해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은 허위도 진실로 만드는 권위가 있다. 법관들 중에는 진실은 두 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들이 낸 결론이 실체와 달라도 그건 또다른 법적인 진실이라고 했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실은 하나다. 진실을 잘못 판단했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시사잡지에 재벌회장의 이면공작과 대법관들의 오판을 지적했다. 내게 거액의 소송에 걸리고 나는 피고가 됐다. 모래 한 알로 성벽을 치는 무모함이라고 남들이 수근거렸다. 1심판사는 내 주장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표정이었다. 그가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장하는 게 사실이라도 하급판사인 제가 어떻게 대법관들의 결론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판사는 내게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항소를 했다. 재판장은 대법관 승진을 눈 앞에 둔 판사였다. 상급법원의 눈에 거슬릴 행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나마나 나는 패소할 게 뻔했다. 나를 확인사살하기 위해 나온 재벌회장이 법정복도에서 찬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 법률고문단의 변호사들을 총동원해서 당신을 파멸시켜 주겠어. 법원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당신 편일 수가 없지.”

더 해 볼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내가 지는 건 불을 보듯이 명확했다. 법원은 나의 잘못을 확인하기 위해 잡지사의 편집장을 증인으로 소환했다.

“어떻게 말도 안되는 그런 허위의 기고를 받아들였죠? 그 내용에 대해 확인해 봤나요?”

재벌이 내세운 변호사가 증언대에 있는 편집장에게 물었다.

“사실확인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잡지에 그대로 실어줬단 말입니까?”
“저는 저기 피고석 엄변호사가 보내온 글은 믿습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방청석에 와서 보고 계시는 회장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편집장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보좌진을 양쪽에 거느리고 앉은 재벌회장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증인으로 나온 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러 그런 의인도 있었다. 정의를 주장하면서 세상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미움을 받을 뿐이다. 그 미움이 두려워 죄악을 말하기가 겁이 났다. 그리고 비겁하게 지내기도 했다.

나는 잡지에 기고하거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가 고소를 당하거나 소송을 제기당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처음 변호사 생활을 할 때 고문을 당한 경우를 참 많이 봤다. 처참하게 얻어터지고 몸이 부서져 있었다. 법정에서 그걸 말해도 판사들은 외면했다. 어떤 때는 법의 무대 뒤에 있는 모략과 악이 보였다.

그냥 보면 보이는 데도 무대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만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를 보는 순진한 아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아이가 소리치듯 그런 것들을 글로 쓰기로 결단했다. 마음이 약한 나는 매번 속으로 겁이 났다. 그런데도 내면에서 어떤 존재가 일방적으로 나를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 존재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어떻든 생각할 것 없이 대담하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거라. 악은 어떤 모양을 취하더라도 악이라고 하고 선은 아무리 세상이 배척해도 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사실 그 자체가 하늘로부터의 복음이란다.’

내면의 소리를 따랐다가 여러 번 피고 팔자가 되었다. 변호사가 아니라 피고가 되는 전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신문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나를 괴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강하게 여기기도 했다.

나는 사회라는 링에서 두들겨 맞고 멍이 들면서 깨우친 게 있다. 강한 사람이 강한게 아니고 약한 사람이 약한 게 아니다. 나같이 약해도 그분을 의지하면 강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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