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여행 길 주저하는 그대에게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이라는 나라의 항구도시 무스카토를 거닐기도 했다. 사막 위에 꿈같이 세워진 정갈한 도시였다. 양파같은 탑이 선 사원과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하얀집들을 보면서 나는 지구별에 여행을 온 어린왕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본문 가운데) 이미지는 <어린왕자> 속 한 장면.

40대 무렵 나는 인생을 어떻게 즐길까 궁리했다. 일을 해서 기본적인 수입만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지는 여행같은 데 투자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소년 시절부터 기차여행을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12월의 마지막 날 밤 서울역에 가서 3등열차에 올라탔었다.

차창을 통해 고즈넉한 밤의 불빛들이 꿈처럼 지나가는 광경에 가슴 시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 신문의 연재소설에서 시베리아벌판을 기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그곳에 꼭 가보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40대 초쯤 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출발하기 이틀 전이었다.

한적하던 나의 사무실로 갑자기 사건의뢰가 들어왔다.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의뢰인은 시베리아가 도망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로 돈을 주려고 했다. 돈은 인간의 영혼까지도 살 수 있는게 현실이다. 나는 망설였다. 그러다 거절했다. 그렇게 묶이면 여행은 후 순위로 밀리고 자칫하면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감성이 물 없는 강바닥같이 말라버린 노후의 여행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발목을 잡는 형태도 여러종류였다. 이번에는 여행 전날 모 신문사에서 주는 인권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니 식장으로 나와 달라는 통보가 왔다. 나는 다시 고민했다. 돈은 거절할 수 있지만 상은 주최측에 미안했다.

여행을 미룰까 생각하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그런 장애는 계속 나타날 수 있었다. 상을 경합하던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상을 받기 전에도 나는 나고, 받은 후에도 나는 나였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항상 어떤 미끼에 홀려 아가미가 낚시바늘에 꿰어진 것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멀리서 낚싯대를 잡고 나를 흔든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뿌리치고 기차를 탔다. 역사의 더께로 얼룩진 낡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나를 9000km 가까운 대륙을 건네주었다. 드넓게 누워있는 지평선으로 내려앉는 진홍의 거대한 붉은 해를 보았다. 하얀 눈송이를 뒤집어 쓰고 싱싱하게 피어오르는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을 지나치기도 했다.

나는 바다도 흐르고 싶었다. 평택항에 가서 아라비아반도로 가는 LNG선을 얻어타고 짙푸른 동지나해를 건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 보았던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떠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낮이면 드넓게 누워있는 청남색의 바다였다. 해수면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갑판을 걷다가 바람을 거슬러 나는 철새 한 마리와 무심히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싱가폴에서 세계 일주중인 이태리 배를 탔다. 그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넜다. 고즈넉하고 적막한 납빛의 바다였다. 바다 표면이 마치 유리판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바다여행을 할 때면 나는 물빛을 즐긴다. 바다의 색은 시간마다 바뀌었다. 오후가 되면 햇살에 비낀 바다는 투명한 남색이었다.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이라는 나라의 항구도시 무스카토를 거닐기도 했다. 사막 위에 꿈같이 세워진 정갈한 도시였다. 양파같은 탑이 선 사원과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하얀집들을 보면서 나는 지구별에 여행을 온 어린왕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홍해를 지나 수에즈 운하를 지났다. 양쪽 강안의 즐비한 집들 베란다에는 말리는 빨래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듯한 맑고 투명한 에게해를 지나 베네치아항구에 도착했다. 나는 편안하게 긴 여행을 끝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했다.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자유의지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는 예전부터 확실히 정의하지 못한 철학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자유의지는 아주 작은 범위지만 약간은 있는 것 같다. 역이나 항구까지 가는 것은 그런대로 나의 자유의지 아니었을까. 물론 그 다음은 나의 능력이 아니다. 기차나 배가 나를 끌고 지구의 반대편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편안했던 긴 여행은 내 능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차와 배에 나의 몸을 맡긴 것은 나다. 내가 만일 이 첫걸음을 걷지 않았다면 기차와 배는 나를 운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 여행은? 역까지 가는 것은 내 작은 의지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본 여인처럼 그게 믿음이 아닐까. 그 다음 나를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것은 그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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