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안국동 그 가게, 성공 거듭하던 그가 어느날…

오래 전 일이다. 한 20년 전쯤 될까. 고교후배가 있었다. 같은 건물 윗 층에서 법률사무소를 하던 후배였다. 그는 변호사를 해서 번 돈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서 쓴다고 했다. 그는 건전한 평론을 실은 잡지를 발간했다. 그의 행동이 부러웠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 선배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어요. 한번 들어볼래요?”

“뭔데?”

“우리 주변을 보면 집안에 모아둔 물건이 넘쳐나잖아? 그냥 남에게 주려고 해도 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고물로 팔려고 해도 값이 거의 없고 말이죠. 그런 물건을 기부하라고 하면 얼른들 할 거야. 그런 물건을 가게에 진열하고 무조건 천원에 팔면 그 물건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은 얼른 사갈거야. 그렇게 하면 기부한 사람은 자선을 해서 좋고 가난한 사람은 헐값에 사서 좋죠. 돈 주고 샀으니까 공짜 뒤에 따라오는 자존심을 다치는 마음도 없잖아요? 가게를 하는 사람은 곳곳에서 모여든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역할을 해서 좋고 말이죠. 천원짜리 지폐는 작은 돈이지만 그게 모이면 그 돈으로 다른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내 아이디어가 어때요?”

“좋은데”

“안국동에 가게터를 하나 봐둔 게 있어.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엄선배가 임대보증금을 대줄 수 없어요?”

그의 부탁에 나는 바로 승낙했다. 열 시간을 일하면 그중 한 시간에 해당하는 품삯은 따로 떼어놓아 그분께 바친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러는 내게 좋은 일 하라고 돈을 맡기는 분도 있었다. 그 돈으로 가게를 얻으면 될 것 같았다. 찬 바람이 불던 그해 겨울 어느 날 밤 나는 조용히 그 가게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게 바닥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가득 담긴 푸른색 플라스틱 박스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후배가 엎드린 채 그 박스들을 힘겹게 밀고 다니면서 정리하고 있었다. 땀으로 번질거리는 이마에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가게로 들어가 지하창고로 내려가 보았다. 냉기 도는 창고바닥에는 낡은 구두들이 가득 널려있었다. 그 구석에 노인 한사람이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닳아버린 뒷굽을 갈고 고장 난 고리를 고쳐 새 신발 같이 만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후배가 내게 말했다.

“평생 구두수선을 하던 분인데 자기는 물건 대신 기술을 기부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와서 수고를 하고 있어요. 저 손에 들어가면 쓰레기 같던 헌 구두가 완전히 새 걸로 바뀌는 것 같아. 천원에 팔면 날개 돋힌 듯 팔려요.”

나의 마음 기슭에 잔잔한 감동이 파도같이 밀려오고 있었다. 냉기 도는 지하창고였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 후배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엄 선배가 씨를 뿌린 이 가게가 작지만 작지 않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가게의 제품은 생산원가가 제로거든. 그러니까 이윤만 있는 거지. 이 가게가 성장해서 수십 수백개가 되면 대기업이나 재벌하고도 맞먹는 경쟁력이 생길 걸?”

후배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드넓은 정신세계를 나는 일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멀리서 그가 운영하는 가게를 보았다.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솟고 가지가 늘어나 무수한 잎을 단 큰 나무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가게가 생기고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후배의 말대로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업이 됐다. 어느 날 가게를 일으킨 그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이 가게를 떠날 때가 됐어요. 내가 만들었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기득권의식이 생기고 안돼요. 다른 운영자에게 이 일을 맡기고 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겠어요.”

“새로 어떤 걸 하려고 하는데?”

내가 물었다.

“물건에 대한 리싸이클 사업을 하다보니까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직종에 있던 사람들이 정년퇴직을 하면 그냥 폐품처럼 쳐박혀 있잖아? 그 사람들의 경험과 재능을 다시 살려서 파는 가게를 만드는 거야. 그걸 헐값에 사고 싶어하는 수요자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런 가게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직력과 실행력도 있었다. 성공을 거듭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실제적인 이유를 모른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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