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폭탄주’와 ‘술 취한 정의’
삼십대 초쯤 동부검찰청의 검사직무대리로 몇 달간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의 분위기는 술자리에서 실질적으로 병아리검사들을 교육하는 것 같았다. 검찰청 간부들이 저녁 술자리에 병아리검사들을 불러놓고 인간테스트를 했다. 폭탄주라고 해서 양주를 글래스에 가득 부은 후 그걸 강제로 마시게 했다.
일곱잔 쯤 연속해서 마시면 토하기도 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이 고문받는 도구이기도 했다. 술을 받아마시는 사람들은 취중에도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였다. 술자리에서의 실수를 겉으로는 관대하게 대하는 척 해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날 검찰청에서 제일 높은 분이 병아리급인 우리들 대여섯명을 집으로 초청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갖춘 이름난 부잣집 아들이기도 했다. 검사장이 호기를 부리면서 고급양주를 한없이 돌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옆에 앉아있던 같이 간 동기생이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재광이 저 친구는 절대 술을 먹이면 안되는데 큰 일 났네.”
“왜?”
내가 되물었다.
“평소에는 양같은데 술만 들어가면 꼭지가 돌아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같이 고시공부할 때 옆에서 그런 모습을 여러번 봤는데 아무래도 지금 위험수위인 것 것 같아.”
나는 그 순간 고교후배이기도 한 그를 보았다. 대머리인 그의 이마쪽으로 붉은 술기운이 마치 온도계같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게슴츠레 풀어져 있었다. 그가 갑자기 우리를 초대한 높은 분을 향해 말했다.
“야 너 그러면 안 돼. 잘난 척하고 폼 잡지 말라고”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어허, 이 젊은 영감이 술 취하셨구만 자자 한잔 더”
검사장이 순간 표정을 고치며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다.
“뭐라고? 한 잔 더 먹으라고? 술 따라 봐 새꺄.”
주위에서 모두들 더 이상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눈짓들을 했다. 검사장이 밖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그를 집으로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운전기사가 돌아와 검사장에게 보고했다.
“’검사장 이 새끼 내려와서 배웅하라’고 뒷좌석에 누워 차의 천정을 막 발로 차고 난립니다.”
다음날이었다. 술주정을 하던 그는 바람 빠진 풍선같이 기가 죽어 있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정식 검사로 임명되고 몇 년쯤 흘렀을 때였다. 그의 위험수위를 알려주던 친한 검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같은 검찰청에서 근무했는데 그 친구 술 때문에 기어이 쫓겨났어. 평소에는 자기주장이 없을 정도로 온순한데 술만 먹으면 왜 그렇게 돌변하는지 나도 알 수가 없어. 검사들과 판사들이 회식이 있었어. 그런데 그 친구가 회식에 참석해서 판사들 술상을 다 둘러 엎어 버린거야. 이미 그 전에도 술먹고 그런 실수가 몇 번 있었어. 위에서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면서 사표를 쓰라고 한 거야. 그래서 그 친구 검사를 그만뒀어. 힘들게 공부해 놓고 술 때문에 인생 조진 거 아닌가 몰라.”
술에 취해 터지는 그의 분노가 나는 어리석거나 밉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눌리고 눌려있던 정의감이 터져나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술이란 게 묘한 물건이다. 교제와 단합을 한다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술을 교제를 위한 수단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술을 먹으면 본성과 약점이 나타나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가 많았다. 술로 친구가 맺어지기는 힘들다는 생각이다. 모임석상에서 상을 뒤엎고 주먹이 오가는 것은 사귐이 아니라 일시적 발광이었다.
범죄인 중 상당수는 그 책임을 술에 돌렸다. 술만 없다면 감옥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경찰예산 재판예산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았다. 룸쌀롱에서의 술은 부패정치가와 사업가의 연결고리고 정치적인 악의 매개물이다. 매수의 대부분은 술좌석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나는 금주론자는 아니다.
포도주잔을 기울이면서 하는 부드러운 대화는 아름답다. 건강을 위해 반주로 조금씩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쾌락에 빠지기 위한 술, 중독성 술, 의도적 교제를 위한 술은 유익하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