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왜 화 내느냐”고 묻거든 “참사랑과 정의의 거룩한 분노”라고

한 여교수가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한서린 표정으로 그녀가 찾아온 사연을 얘기했다.

“아버지가 평생을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모은 돈 오백억원과 땅을 기부해서 재단을 만들었어요. 사회원로를 이사장으로 모셨죠. 이 사회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써 달라는 게 아버지의 취지였죠.”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이사장이 된 분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어요. 이사장이라는 분은 최고급 호텔에서 수시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더라구요. 아버지는 평생 그런 호텔에는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어요. 좋아하는 소주도 자기 돈으로 사 마시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음식점에 가면 남들이 먹다 남기고 간 소주가 들어있는 병을 슬며시 가져다가 마시는 걸 제가 여러 번 봤어요. 그런 궁상을 떨지 마시라고 해도 아버지는 ‘아깝잖아?’라고 했어요. 젊어서부터 철저히 절약하는 습관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기부했는데 이사장이란 사람이 아버지의 돈을 낭비하는 걸 보고 저는 분노가 치밀어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 외 재단에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아버지가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돈을 기부했는데 엉뚱하게 돈이 없어졌어요. 이사장은 아버지가 기부한 노른자위 땅을 그냥 방치하고 있어요. 그 땅이 세금폭탄을 맞자 재단의 돈을 쓰는 거예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사장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앉히고 자기들 마음대로 월급을 높게 책정해서 아버지의 돈을 빼먹는 거예요. 화가 나서 미치겠습니다. 무슨 소송이라도 걸어서 그 이사장에게 경각심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갔다. 동시에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분노는 시각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 이사장은 총리 물망에까지 오른 법조계의 원로였다. 내가 막연히 알기로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엘리트코스를 밟는 데 실패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법관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법복을 벗고는 변호사가 되어 대한변협회장을 하고 정치적으로도 거물로 성장한 것 같았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그에게 고급호텔에서의 파티는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가 뒷 골목 허름한 식당에서 회의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무렵 또 다른 사회단체의 사람들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그 단체의 여성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단체는 외환위기 때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에서 남은 돈으로 설립됐습니다. 그런데 이사장이 된 사회원로라는 분이 서너개의 커다란 사회단체 이사장직만 즐기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예요. 법률적으로 이사장의 불성실에 대한 제재방법은 없을까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이사장 자리를 내놓지도 않아요.”

내게 찾아와 호소하던 여교수가 말하던 이사장과 동일한 인물이었다. 대충 그 이사장을 하는 원로의 일면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그에게 덤벼드는 법조후배들은 없을 것 같았다. 낙인 찍히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몇 번 그를 본 자리에서 공손히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성의없이 인사를 받는 것 같았다. 존경스럽지 않았다. 얼마 후 법정의 판사 앞에서 그와 마주 앉게 되었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자네 이런 행동을 하면 안돼. 내가 징계위원회에 넘길 수도 있어.”

그 말에 나의 분노가 터졌다.

“자네라니? 어디서 자네라는 말을 함부로 쓰십니까? 지금 재판중 아닙니까? 나는 지금 변호사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반말하지 마세요. 나도 손자를 둔 할아버지 나이인데 어디다 대고 함부로 지껄이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이 뭔데 나를 징계위원회에 넘긴다는 겁니까?”

순간 그가 자라목같이 움츠러들었다. 싸우면 그가 잃을 게 많았다. 보고 있던 재판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엄 변호사님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이건 그냥 우리들의 일상 업무일뿐 아닙니까?”

<거룩한 분노> 영화 포스터

그날의 재판이 끝나고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반성해 보았다. 성을 내면 안 된다고 배웠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아야 한다고 했다. 성을 내는 것은 믿음과 수양의 부족이라고 인식해 왔다.

오늘같이 모욕을 당한 느낌이 들 때 나는 분노를 터뜨렸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나를 비난했지 모욕한 사람을 탓하지 않았다.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수시로 분노했다. 억울함이나 불공정을 보면 화가 났다. 그런 걸 보고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사랑이 얕은 사랑일 것 같았다.

예수님도 화를 내며 성전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저주하면서 분노했다. 성경속 수많은 인물들은 성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을 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거룩한 분노가 있다고 믿는다. 참사랑과 정의에 따르는 분노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허락하시는 것 같다. 다만 가볍게 성내지 않고 성을 내도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