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모병원 채정호 정신과 의사의 20년 ‘ABC 일기수첩’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그는 20년째 ‘ABC 일기수첩’을 쓰면서 의사 스스로 본인의 마음훈련 긍정훈련을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함영준>

[아시아엔=함영준·마음건강 길(mindgil.com) 대표, 전 조선일보 사회부장] 요즘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선 “단군 이래 정신과가 가장 성업중인 시대”라는 농담이 유행한다고 한다. 그 많던 소아과는 속속 문을 닫고 있지만 정신과는 개업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이젠 소아과보다 정신과 의원이 더 많아졌다.

한국인의 정신건강이 코로나 팬더믹 3년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다. 과거 OECD국가 중 20년 이상 자살율 1위를 기록했었는데 이젠 우울증도 1위 국가가 됐다.

보건복지부와 한국트라우마 스트레스학회가 작년 12월 조사한 ‘국민정신건강실태’를 보면 가장 쌩쌩해야 할 19~39세 젊은층이 가장 나쁜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남녀노소 모두 3년전보다 불안·우울·자살생각 지수가 더욱 악화됐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코로나 감염 숫자를 줄여 국가방역차원에선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전 국민을 장기간 격리·차단한 후유증이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어린이들은 발달장애적 측면에서, 성인들의 경우 혼자 지내는 데서 오는 고립감·불안감에 혼술 음주도 심해져 사회적·신체적·정신적 웰빙상태가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집단-가족주의가 강하고 정(情)이 많은 민족이 아니었던가.

채정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 대표적인 정신질환으로 우울, 불안, 분노장애를 꼽는다. 모두 부정적 정서가 뒤얽혀 있는 병이다. 환자들 특징은 어떨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이나 주변, 또 사회를 돌아볼 때 ‘괜찮다’, ‘이만하면 됐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심리적 유연성을 갖고 사는데 병원을 찾아오는 분들은 그런 게 너무 없다. 그저 과거를 후회하고 우리 사회를 절망적으로 본다. 또 남에 대해서 화나고, 자신에 대해서도 자학·자책을 한다.”

-열심히 살아온 한국인들이 왜 그토록 과거를 후회하고, 자학을 할까.

“너무 성장발전에 도취돼 ‘마음밭’을 갈고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조선시대는 그래도 충효사상, 선비정신이 있었는데 지금 기성세대는 운동권이든, 우파든 무엇을 후손에게 가르쳐 주었는가”

-우리나라는 가장 낙후된 나라에서 세계 선진국으로 도약한 ‘기적의 나라’인데도 우리 스스로 너무 부정적 비판만 하는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과거 우리 역사·지도자·정책·노력을 지난 30년간 부정만 하다 보니, 도대체 우리 주변에 신뢰하고 존경할 대상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데서 자란 젊은 세대가 자긍심을 갖고, 또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을까.

“나도 개발연대에 태어나 자란 세대지만 과거 국가도, 사회도, 또 우리들도 그때 가진 자원이나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 지금 돌이켜볼 때 보이는 잘못, 문제점, 실수들은 그때 우리들이 제대로 못 산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 아픈 분들 대부분이 남도 인정 안하고,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채정호 교수는 “정신과 치료 목표는 외적 상황 변화나 심리적 갈등에 대해 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힘(수용력)과 유연성을 키워주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마음이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here & now)’에 머물러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심리적 발전이 참 어렵다”고 토로했다. 부정적 생각이 너무 고착화돼 있는 것이다.

채 교수가 환자들을 ‘지금 여기’에 집중시키기 위해 권유하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물론 약, 심리치료, 상담 등의 의료서비스는 기본이다. 아울러 운동, 친구관계, 취미활동, 명상, 종교활동 등 각자 ‘지금 여기’에 몰두해 즐거워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주는 게 정신과 의사의 책무다. 그들이 삶에서 기쁨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고, 건강한 심리적 자원을 강화시키도록 말이다.

ABC 일기수첩에는 매일 △A(Appreciation, 감사) △B(Better & Better, 더 좋은) △C(Care & Connection, 배려와 연결)와 관련된 실천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사진 함영준> 

과연 각자 자기 삶에 좋은 것들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그는 페이지마다 펜글씨로 빼곡히 적힌 자신의 수첩노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20년째 매일 쓰고 있는 ‘ABC 일기수첩’이다.

A(Appreciation, 감사)의 경우 매일 감사해야 할 일 5가지, B(Better & Better, 더 좋은)는 어제나 과거보다 나아진 일 한가지 그리고 C(Care & Connection, 배려와 연결)는 남에 대해 배려한 일 3가지를 적는 것이다. 

책장 한귀퉁이에 보관돼 있는 채 교수의 ABC 일기수첩에는 하루 5건 줄잡아 1년 1800건씩 감사할 일만 따져도 20년 동안 3만건 넘게 기록돼 있다. 

그는 밤에 자기 전 일기노트에다 그날 실행한 일들을 적어 넣는다. 만약 부득이 할당량을 다 못했을 경우 다음날 반드시 채워 넣는다. 따라서 평소에 늘 의식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오늘 C(배려)가 하나 부족했다면 집에 들어갈 때 경비원 아저씨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고생하신다”고 위로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스스로 ‘마음밭’을 가는 일이다. 마음이 힘든 환자들을 대하려면 자신부터 마음이 건강하고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의사 스스로 매일 마음훈련·긍정훈련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 장로인 채 교수는 동료 의사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만나 명상도 하며, 아예 대한명상의학회를 만들어 함께 공부도 한다. 환자들을 위한 치료로도 좋지만 명상을 하면 우선 의사들 본인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했다. “의사들 심신 컨디션이 좋아지면 당연히 환자들 치료에 도움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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