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 칼럼] 이선균과 엠마 왓슨, 인생의 정상에 선 그들의 선택
# 10세때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엠마 왓슨(33)은 지금 영화계를 떠나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글쓰기와 희곡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는 최근 인터뷰에서 “성공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으나, 막상 세계에서 가장 성공하고, 아름답고, 엄청난 사람들과 함께 맨 앞자리에 앉는 영광을 얻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많은 유명인사(celebrity)들이 성공의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추락했다.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휘트니 휴스턴, 로빈 윌리엄스 등 숱한 인물들이 약물중독·사고·자살 등으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성공에 도취한 방종보다는, 막상 생의 정상(頂上)에 올랐을 때 마주치는 공허와 허무감, 살인적 스케줄,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유리방 속 삶에서 질식사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새장에 갇혀 AI 로봇 모드로 살지 않고, 뛰쳐나와 내 삶에 대한 주권 회복을 해서 기쁘다”고 말하는 엠마 왓슨이야말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행동으로 옮겼을 때 나이는 20대 후반. <미녀와 야수>, <작은 아씨들>로 세계 최정상의 배우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 얼마 전 배우 이선균이 유흥업소 종업원과 마약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터졌을 때, 사건 자체는 단순한 것으로 보았다. 정상에 선 인기인이 만만치 않은 삶의 갈증을 해소하려다 유혹에 빠졌고 마약까지 간 것으로 보았다. 숱한 인물들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 나는 이를 ‘삼류 스토리’라기보다 ‘리얼 스토리’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헤쳐 나오길 바랬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가 숨진 채 발견된 와룡공원은 3년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비서와의 스캔들로 자살한 곳이다. 2020년 7월9일 그날 나는 전생(前生)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과 만났었다. 그녀는 윤회와 카르마를 믿으며 생로병사의 많은 문제를 본인의 전생과 업(業)과 연관해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날 그녀는 자살이 우주의 카르마(karma) 법칙을 어기고 업을 늘리는 참 나쁜 행동이라고 했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박원순 시장이 스캔들로 허무하게 사라진 소식을 접했다. 과거 법조 기자 시절부터 좀 아는 편인데 과연 그의 업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인권변호사, 공익운동가까진 좋았는데, 팔자에 맞지 않는 정치가, 그것도 대통령후보까지 올라간 것이 결국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 것인가.
# 운동권 진영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박원순 시장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고 나는 외국 사례를 찾아보았다.
정치엘리트의 대표적인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1960년대 초 ‘프러퓨모 스캔들’이 꼽힌다. 영국의 전쟁장관 프러퓨모(46)가 27살 어린 19세 클럽 댄서와 사교클럽서 만나 교제하다 들통 난 사건이다. 더구나 그 여자는 살벌한 냉전시대 소련측 스파이와도 내연관계라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의심된 사건이었다.
25살 때 의회에 진출한 5선 하원의원에 외무장관까지 지내 영국의 차기 총리감으로 불리고 가문·학벌·경력·외모에서 ‘영국의 케네디’로 비유될 만큼 승승장구하던 프러퓨모는 하루아침에 미성년 매춘부와 놀아난 플레이보이로 전락했고, 그의 이름은 20세기 섹스스캔들의 대명사가 됐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다. 그 사건 이후 프러퓨모는 잠적했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고 런던의 약물·알코올 중독자 구제 자선단체인 ‘토인비’의 자원봉사자로 들어가 2006년 91세로 죽을 때까지 43년간 봉사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청소를 했으며 나중에는 관장으로 봉직했다. 언론과 일체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진정성이 알려지면서 당시 엘리자베스여왕은 대영제국 훈장(CBE)을 직접 그에게 수여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는 그를 초대해 “우리 사회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과연 대영제국의 인물다운 사람의 처신이었다.
# 만약 이선균이 온갖 오해나 창피를 무릅쓰고, 또는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고 이 풍진 삶을 꿋꿋이 견뎠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5년, 10년, 20년 낮은 자세로, 또는 반성과 속죄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냄비근성’의 한국인들은 화도 잘 내지만 정(情)도 많은 사람들이다. 이선균의 진정성이 인정되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연기는 정말 볼만 하지 않았을까. 그가 즐겨 맡았던 로맨틱 주인공이나 정의로운 인간 역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은 대부분 그리 반듯하지 않았다. 울퉁불퉁했고 온갖 천박한 실수, 시행착오 그리고 척박한 경험 속에서 탄탄해지고 잘 익은 와인처럼 깊어졌다.
유명인사들 얘기 접어두고 우리네 삶으로 되돌아오자. 당신과 나는 새해 지금 안녕한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익명의 일상 속에서 숨어살면서 실수도, 일탈도, 악의도 지니고 살지만 그래도 제대로 살겠다고 가끔씩 생각은 하고 사는가?
이선균의 자살을 옹호하지도 옹호할 생각도 없지만, 개인의 잘못된 판단으로만 몰아가는 논조에 동의할 수 없다. 검경의 인격 살인에 가까운 일방적 수사와 이를 조장한 언론, 방조하고 부추긴 권력까지. 이선균이 놓인 처지는 엠마 왓슨하고도, 존 프러퓨모하고도 달랐다. 본인이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과 무죄를 주장했고, 유죄임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반성과 속죄를 운운하는 것도 성급하다. 박원순, 노무현의 죽음 또한 이 짧은 글에 특정 의도를 갖고 인용되기엔 적절하지 않다.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정치가를, 또 대통령을 꿈꾸는 게 업에 맞는 사람이 따로 있고, 맞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나. 이미 고려 시대 때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외치며 봉기했다. 누구나 국가 최고 지도자를 꿈꿀 수 있고 그 꿈을 향해 스스로를 그에 걸맞은 인품과 능력으로 도야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아니한가. 꿈꾸는 것을 막는 것보다 걸맞지 않은 자가 자리에 올라 온 국민을 고통과 도탄에 빠뜨리는 것을 막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