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조국 교수와 서머셋 모옴의 ‘크리스마스 휴일’

조국 교수 <사진=연합>

중학 2학년 시절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국어교과서를 열심히 암기하고 있었다.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딱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 “공부할 필요 없어. 그 아이의 집에 가면 기말고사 문제와 답을 미리 얻어낼 수 있어.”

그게 사실이었다. 재벌집 아들이 학교 선생님들한테 전과목 개인과외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시험문제와 답을 아예 통째로 건네주고 있었다. 그 부자집 아이는 그 사실을 자랑하면서 친한 아이들에게만 시험문제와 답을 알려주었다. 시험 때가 되면 그 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국어 문제를 빼돌린 담임선생에게 이게 공정한 것이냐고 항의했다.

그 얼마 후 나는 숙직실 뒤 공터로 끌려가 선생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졌다. 주먹이 얼굴로 날아오고 구둣발로 밟혔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면 되는데 내가 매를 스스로 벌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날 밤 누군가 교무실에 침입해서 문제를 빼돌린 선생들의 서랍 속에 쓰레기를 가득 채워놓고 사라졌다. 그게 누구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재벌집 아이들이 받는 족집게 과외라는 게 있었다. 과외선생이 대학의 시험문제를 기가 막히게 적중시킨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족집게가 아니라 대학입시 출제를 하는 교수를 만나 어디에서 문제가 나올지 그 정보를 미리 빼내는 것이었다.

우리 시절 대학입시에서 대리시험도 있었다. 1차시험에 합격한 공부선수들이 추가모집이나 2차 대학에서 대리로 시험을 봐서 합격시켜주는 것이다. 감독이 허술하던 시절이었다. 사진관에 가서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 합성하면 무심한 감독관이 발견을 하지 못했다.

예능계 대학의 교수에게 레슨이라는 형태로 미리 돈을 주기도 하고 실기시험관에게 돈다발이 가득한 박스를 가져다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게 내가 살아왔던 시대의 악취나는 시궁창 같은 교육현실이었다.

법무장관을 지낸 서울대교수 출신 조국씨가 자녀의 입시비리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허위 인턴확인서와 표창장을 만드는 데 관여하고 외국대학의 온라인 시험을 대신 치렀다는 혐의인 것 같다.

부정과 비리에 오염된 사회 속에서 살던 나같은 사람은 ‘그 정도밖에?’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 이유에서 입시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준엄하게 말했다. ‘남들이 다들 하는데 뭐?’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던 부모들에게 경종이 울린 셈이기도 했다.

이 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교육과 상속이었다. 능력 없는 부잣집 아들이 세습 회장이 되어 똑똑한 친구들을 평생 머슴으로 부리는 걸 보기도 했다. 나는 봉건시대 상놈같이 그 철옹성의 성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교육은 개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사다리에 매달렸다. 그곳에서의 불공정에 사람들은 특히 민감하다. 그런 현상은 우리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모옴이 쓴 <크리스마스 휴일>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런던 근교에서 채소밭을 일구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돈만 있으면 열심히 밭을 사들였다. 도시의 주거지역이 자꾸만 변두리로 퍼지는 바람에 그는 엄청난 부동산 부자가 됐다. 그는 큰 아들을 명문대학에 보냈다. 농부 출신인 그는 아들을 상류층에 진입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엘리트로 인정받는 대학 졸업장을 사양했다. 아버지의 채소밭이나 지키는 자신에게 대학졸업장은 격에 맞지 않게 뽐내거나 위만 쳐다볼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냥 평범한 서민층으로 남아있겠다고 했다. 선진국에서도 그런 가치관의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조국 장관 가족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권력의 검찰개혁과 그에 대한 반발은 엘리트와 카운터 엘리트의 충돌 아닐까. 몇 년을 끌어온 사법부는 정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것일까. 대학진학율은 70퍼센트인데 대기업에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것은 40퍼센트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백수로 노는 30퍼센트의 대학 졸업자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대학졸업장이 왜 필요할까. 재판장은 공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언급했다. 세상이 그렇게 나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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