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어느 법조인들의 젊은 시절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해왔다는 청년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하다. 생활비가 없어서 더 이상 고시원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흐린 저녁 들길에 혼자 있는 사람같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 같다. 서글픈 얼굴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또다른 고시원의 작은 방이 나타나고 벽에 걸린 모자에 육군대위 계급장이 반짝거린다. 장교로 제대하고 7년째 경찰공무원 시험준비를 해 왔는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교원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여성의 얼굴이 나온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괴로움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좌절하고 끼니를 때울 돈이 없는 청년들에게 그곳에서 무료로 밥을 해주는 봉사자 노인이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처음에 고시촌으로 들어올 때는 눈이 반짝거리던 젊은 사람들이 시험에 7~8번 떨어지고 나서는 어깨가 축 처진 채 절망한 표정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걸 보면 참 안 됐어요.”
노량진 고시촌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가난한 집 아들들이 밥을 얻는 방법이 지위가 높던 낮던 공무원직을 얻는 것이다. 돈 있는 개인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국가의 머슴이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나도 고시원이나 산속 고시원인 절 생활을 했었다.
노량진 고시촌의 풍경을 보면서 50년 세월 저쪽에 있던 광경 하나가 시간을 흘러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이 두껍게 덮인 가야산 자락에 있는 원당암이라는 암자에 있었다. 밤이면 숲속의 겨울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파도소리를 내고 깊은 골짜기에서 굶주린 산짐승들이 처연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의 대접에 든 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저녁이면 장작 두 개피가 배급됐다.
그 암자에 같이 밥을 먹던 몇 명의 노장 고시생들이 있었다. 모두들 인생의 막장에 이른 듯 했다. 3만원이라는 최소한의 생존비마저 남의 도움을 받는 공통된 가난을 가지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궁상맞았다. 낡은 군복을 입은 채 개울가 먼지를 뒤집어 쓴 잡초처럼 수염이 난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정씨, 노동자들이 쓰는 털모자에 땟국이 낀 한복 바지를 입은 신씨, 두툼한 솜바지를 입고 각진 턱에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나이먹은 강씨가 있었다. 우리들의 모습은 이병주 소설 속에 나오는 빨치산 같았다. 얼어붙은 새벽별이 허공에 떠있는 새벽 목탁소리가 들릴 때가 아침 공양시간이었다. 눈을 부비면서 썰렁한 요사채의 구석방으로 가면 베니어로 만든 길다란 상에 밀쌀로 삶은 밥, 멀건 시레기국, 얼어붙은 김치와 동치미가 놓여있었다. 상의 표면에 얇게 얼어붙은 얼음을 타고 그릇들이 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밥상 앞에서 우리들은 먹는 얘기를 했다.
“밥에 계란을 깨서 간장 한 숟가락을 넣고 비비면 맛이 그만인데 말이야”
강씨가 말했다.
“아니야 두부를 구워 먹는 게 더 좋아”
신씨의 말이었다.
“이럴 때 맛갈 스러운 명란젓이 있으면 밥이 잘 넘어갈텐데”
정씨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모두들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군복을 입은 하얗게 바랜 정씨가 이런 말을 했다. “며칠 전 서울에 다녀왔어. 우연히 종로 거리에서 고시에 합격한 서울법대 동창을 만났는데 세련된 양복을 입고 예쁜 여자와 함께 가는 걸 보고 마주칠까 봐 옆에 있는 골목에 얼른 숨었어. 내 모습을 보니까 상대적으로 기가 죽고 너무 슬펐어.”
그 말을 듣고 고참이 강씨가 한마디 했다.
“나도 고향에서 천재로 알려졌었어. 서울법대에 들어가니까 마을에서는 당장 판검사가 나온 줄로 알고 떠받들어 줬지. 고시공부를 하는 세월이 어느새 대학을 두 번 졸업하고 대학원도 졸업했을 만큼 흘러버렸네. 나이만 먹고 말이야. 몇년 전 뒤늦게 방위로 군대에 가니까 어린놈들이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한되짜리 주전자에 든 물을 나보고 다 마시라고 기합을 주는 거야. 생짜로 그 물을 다 마시니까 코에서 입에서 물이 뿜어나오더라구. 힘든 세상이야. ”
우리들 중에 좌장격이었던 신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그의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가 꾹 참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 무렵 산 아래 식당가에 가서 오랫만에 밥을 사먹었어. 소주를 한병 곁들여 시켜 먹었지. 옆자리에 해인사의 도찰승이 있었어. 절의 군기를 잡는 중을 도찰이라고 하지. 나보고 공부하러 온 새끼가 술을 쳐 먹는다고 시비를 거는 거야. 나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나이도 먹었는데 너무한다 싶어 논리적으로 점잖게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주먹이 날아오면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거야. 언젠가 도찰이라는 그에게 사과받고 싶어.”
우리는 물의를 일으키면 생존비로 나오는 장학금이 끊길까봐 인내하고 견뎌내야 했다. 그게 젊은 날 고시생인 우리들의 한 단면이었다. 그때부터 세월이 또다시 많이 흐르고 우리들은 남은 잎이 한 둘 되는 겨울나무가 되어 바둑을 두는 사람들 같이 지난날을 복기해 본다.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또 다른 행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던 정씨는 고시에 수석합격 하고 변호사가 됐다. 돈을 많이 벌고 자유분방한 성격에 맞춰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면서 일생을 재미있게 산 것 같다. 한되 짜리 주전자의 물을 억지로 다 마시는 기합을 받았던 강씨는 검사장을 한 후 퇴직했다.
거대한 사이비 종교의 수사책임자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걸 보고 반가왔다. 도찰승한테 얻어맞았던 신씨는 검찰의 최고자리 근처까지 갔다. 그는 나중에 해인사를 찾아가 스님들에게 한턱 크게 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퇴직 후 유명대학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얼핏 본 적이 있다. 젊은 시절의 외롭고 춥던 기억에 세월이 덮이니까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인생은 길게 살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