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외로운 사람들
25년 전쯤이다. 토론토에서 노바스코샤까지 아메리카를 횡단하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노인이 있었다. 그 당시 일흔다섯 살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백살이 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캐나다 시골동네의 예쁜 묘지 구석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하던 그 노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일정때 간신히 보통학교에 다니던 놈인데 40년전 백인들만 사는 알래스카의 오지에 혼자 떨어졌어요. 석유가 난다고 해서 노동자로 온 거죠. 춥고 낯선 곳에서 얼마나 막막하고 한심했는지 몰라.”
40년전이라고 하면 1960년 무렵 전후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한국이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수은주가 영하 20~30도 밑으로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마을에서 일하다가 전기공이 됐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결혼하게 됐죠. 한번은 마누라 하고 겨울의 알래스카 벌판을 가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는 거예요. 집사람이 차에서 내려 멀리 가지도 않고 바로 도로의 갓길에서 웅크리고 앉아 볼 일을 보려고 하는데 굶주린 늑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보는 거야. 마누라가 빤스도 못 올리고 혼이 빠진 채 엉금엉금 기어 오더라고…”
그 부부의 고립과 추위와 처절한 외로움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혼자인 그 부부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급노동이 아니었을까.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살던 산맥의 깊은 숲속 공터에는 아직도 이끼가 가득 낀 초라한 중국인 묘지가 많아요. 아메리카의 대륙횡단철도를 가설할 때 건너온 중국인 노동자들의 묘지죠. 그런데 그 중국인들 묘지 근처에서는 금화가 가득 담긴 단지들이 종종 발견되곤 해요. 당시 중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67센트였는데 그걸 모아서 금화로 바꾸어 단지 속에 감추어 뒀던 거죠.”
그 중국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단지에 가득한 금화였을까? 수고하다가 외롭게 죽어간 그에게 그 금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노인의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 내려면 어떤 기술이든지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백인들 차고 안을 들여다 보면 전기수리, 차수리, 집수리도구 등 없는 게 없어요. 서양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리숙해 보여도 다들 속이 꽉꽉 들어찼어요. 영리한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런데 한국에서 돈 좀 들고 이민온 사람들을 보면 골프채를 꼰아 들고 놀러다녀요. 꼭 그렇게 하지 않고 가게를 하더라도 전기 하나 못 고친다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노인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꺼냈다.
“한달 전쯤일거요. 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몹시 치는 날 밤 2시경이었어요. 야채상을 하는 한국인 집에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 왔어요. 정전으로 온 집안에 불이 나갔다는 거예요. 그런 밤늦은 시각이면 외국 기술자들은 절대 가지 않아요. 밤에 얼마나 무섭고 힘들겠어요. 그래서 내가 차를 몰고 쏟아지는 비속을 뚫고 갔죠.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번개 여러 줄기가 밤하늘을 갈라놓더라구요. 차에 벼락이 떨어지는 줄 알고 가슴이 조마조마 했지. 가서 살펴보니까 아주 간단한 고장이더라구. 다시 불이 환하게 들어오니까 너무들 좋아하더라구. 그 집 여자가 내 나이먹은 모습을 보더니 불쌍해 보였는지 몇 살인데 아직 일을 하시느냐고 묻더라구요. 자식은 있느냐고 묻기도 하구요. 내가 이렇게 늙었어도 시간당 275달러 받는 고급 전기 기술자예요. 여기 백인 변호사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어요. 한밤중에 간 내 수고비를 알면 그 여자가 놀라 자빠졌을 거요.”
그 노인의 투박한 말과 경험속에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인간은 북극에 혼자 떨어뜨려 놓아도 그렇게 혼자 살아간다. 남극에 가까운 남아메리카의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에 갔을 때였다. 조그만 라면집을 하는 내 또래의 한국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나서 헤어질 때 그와 포옹을 했다. 그의 외로움과 정이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내남없이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끝없는 지평선을 걸어가는 외로운 존재들이 아닐까. 누구는 그걸 보라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 앉아서 글을 쓰는 앞에는 어두운 바다가 드러누워있다. 그 바다 위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혼자 고기를 잡는 어선의 불빛들이 깜빡거린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가 떠오른다. 노인은 달빛이 번쩍이는 검은 바다 위의 배에 혼자 앉아서 자기를 견디고 있었다. 참나를 찾는 고독에 보다 익숙해 지고 싶다.
님의 칼럼을 읽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참나를 찾는 고독에 익숙해지고 싶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