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나의 성공 뒤엔 수많은 이들의 실패와 희생이 있음을…
나의 생업이었던 변호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것 같다. 요즈음은 소가 되새김을 하듯 나와 인연이 닿아 내 삶속을 잠시 스쳐 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때 보지 못했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일전엔 업무일지 속에서 조용히 잠자던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이빨 틈이 벌어진 그의 모습은 헐렁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할까. 사람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사가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중년의 무술인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꿈이 배우였다.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근육질의 이소룡을 보면서 꼭 그런 연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태권도, 합기도, 검도, 화랑도를 연마하면서 합계가 수십단의 무술 고수가 됐다. 그는 영화판에 진출했다. 진출이라고 하지만 영화사 사무실 바닥청소부터 시작해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다. 무술을 한 그의 몫은 촬영 때 시비를 거는 동네 건달을 퇴치하는 일이었다.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것 같았다.
어느 날 그가 꿈꿨던 무술영화는 영화판에서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코믹해 보이기도 하는 그는 조역이나 단역 자리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무술실력 덕분에 그는 다행히 스턴트맨이 됐다. 그래도 그는 신이 났다. 스턴트맨이라는 게 위험한 장면에 국한되지만 그래도 그 짧은 순간 그의 몸은 주연배우였다. 그는 열심히 그 일을 했다. 한번은 사극촬영장에서 크게 다칠 뻔했다.
그날의 촬영은 협객인 주인공이 불붙은 집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이었다. 겉만 그럴듯하게 만든 촬영용 옛날 의상을 걸치고 검객으로 분장한 그가 소품인 칼을 들고 셋트장 안에 설치된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종이같은 얇은 천으로 만든 촬영용 의상은 불씨가 조금만 닿아도 후루루 타버릴 것 같았다. 각목과 베니어에 인화성 페인트로 칠한 셋트는 엉성했다. 불쏘시개 속에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촬영이 시작됐다. 스탭들이 그의 주변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길이 일었다. 피디의 큐사인이 떨어졌다. 홍길동 같이 분장한 그는 너울거리는 불길을 날렵하게 뚫고 마당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림이 좋지 않아.”
담당 피디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한번 찍자는 것이었다. 엉성한 세트장의 집은 벌써 무서운 기세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 정도는 돼야 실감이 나”
피디가 불길을 보면서 내뱉었다. 카메라들이 다시 각 위치에서 촬영 태세를 취했다. 그는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였다. 불붙은 대들보가 등으로 떨어졌다. 그는 불붙은 나무토막들을 손으로 잡아 밀쳤다. 잘못하면 촬영의상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그는 각본대로 불 속에서 뛰어나왔다. 몇 초의 촬영이 끝났다.
어느새 카메라와 스텝진은 다음 장면을 찍기 위해 이동했다. 그는 관심권 밖에 혼자 서 있었다. 불에 덴 손과 등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얼마 후 촬영이 끝난 후 담당피디가 지나가다가 물었다.
“괜찮아?”
“그럼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스턴트맨은 아파도 아프다고 할 수가 없었다. 촬영은 실감이 나야했다. 주인공에게 진짜 얻어맞고 넘어질 때도 사실은 아팠다. 말에서 떨어질 때도 눈에서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동차에 치여 바리케이드를 안고 뒹굴 때도 정신이 없었다.
전쟁영화 촬영에서 폭약이 잘못 터지는 바람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스탭들이 약속된 장소가 아니라 엉뚱한 장소에 그걸 묻어 두는 바람에 모르고 지나가다가 당한 것이다. 그는 변호사인 내게 등과 팔뚝 그리고 다리를 보여주었다. 온갖 종류의 흉터가 흉칙한 문신같이 찍혀 있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상처를 보았다.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없었다. 육체적인 상처만이 아니었다. 감정노동자들이 받는 영혼의 상처는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한 명의 성공 뒤에 있는 1천명의 실패와 눈물이 있는 게 세상이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어떨까. 백조 같은 발레리나의 발가락은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다. 시합에서 이긴 레슬링이나 유도선수의 귀는 바닥에 쓸려 두툼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경찰병원에 가면 범죄인들의 벽돌에 찍히거나 칼에 맞은 경찰관들이 수두룩하다. 세상에 힘들고 상처받지 않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감나무는 상처 난 부분이 단단해져서 좋은 목재가 된다고 한다. 상처란 인간의 영혼을 한 단계 높게 하는 그분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