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고품격 영혼의 즐거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다가 하나를 배웠다. 70대인 그는 어떤 일을 마주칠 때 ‘이게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인가?’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상큼한 기준이었다. 앞으로는 그걸 기준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를 점검해 보았다. 매일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글을 써 왔다. 그게 즐거운 것인지 의무나 습성으로 잡혀서 하는 것인지 살펴보았다.
기도와 성경에서는 내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듯 은은한 기쁨이 피어났다. 글은 어떤가? 언어의 집을 짓는 목수처럼 어떤 성취감이 있다. 또 내게 어떤 즐거움이 있었지? 평생 책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초등학교 시절 옆에 오징어나 포도 한 송이를 놓고 재미있는 책을 보고 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십대도 암자의 뒷방이나 고시원의 쪽방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라면을 끓여먹는 순간이 내게는 천국이었다. 40~50대 법정에서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책을 읽었다. 평생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게 독서였다. 지난 1년 사이 새로 발견한 즐거움이 있다. 비단같이 부드러운 청록색 바닷가 데크 위를 느릿느릿 걷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갈매기가 바람을 타고 여유 있게 날고 하얀 파도가 줄을 긋듯이 다가오는 바다를 본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황혼무렵의 바다 풍경은 하나님의 물질적인 모습이었다. 요즈음 나는 혹시 내가 찾지 못한 보석 같은 즐거움이 있는지 여기저기 묻고 다니기도 한다. 어제는 원로 탤런트이자 정치를 했던 친구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인기도 돈도 권력도 명예도 다 나름대로 누려본 친구였다. 물론 인생의 쓴맛을 본 굴곡도 있었다.
“요즈음은 뭐가 즐겁니?”
내가 물었다.
“나이 칠십인데도 드라마 배역을 맡았어. 이순재나 신구 선배를 빼면 내가 이제는 그 다음 원로 탤런트야. 첫 장면이 주인공이 땅속에서 나의 시신을 파헤치는 건데 이 겨울에 흙 속에 묻혀 시체를 해야 하나 생각했지. 피디가 어떻게 그렇게 하시느냐면서 실리콘을 떠서 모형으로 하겠다고 하더라구.”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젊어서부터 하던 자기 일을 늙어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인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젊은 시절 주인공 역을 맡아 최고의 미녀 배우들과 드라마를 찍었지. 드라마 안에서지만 재벌회장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그랬어. 실제로 국회의원이 되서 대통령의 최측근을 해보기도 했지. 대통령 앞에서 웃기는 얘기하면서 담배를 피운 건 나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지나가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다 무상한 것 같아. 요즈음은 잘난 놈들 말고 못나고 가난한 후배들을 만나 삼겹살이라도 사주면서 낄낄대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그 후배들이 칭찬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너무 즐거워.”
나는 그의 말에서 진짜 즐거움은 고립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만남에서 얻어진다는 걸 깨닫는다. 며칠 전 서초동에서 80대 법조 선배를 만났다. 오랫동안 법관 생활을 했고 변호사를 하면서 부부가 ‘사랑샘’이라는 복지법인을 했다. 기부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직접 도와온 성자 같은 부부였다. 같이 점심을 하면서 그 선배에게 물었다.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게 즐거우십니까?”
“판사 생활을 할 때 즐거웠던 게 없었던 것 같아요. 무취미 무특기였죠. 그냥 주말이 되면 산에 가는 게 즐거움이었다고 할까. 변호사를 하면서 삶에 지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죠. 선행이라는 게 남모르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내면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기쁨이 있어요.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는 즐거움이죠. 그 맛에 계속하게 되고 우리 부부가 법인까지 만들게 된 거죠. 이제 나이 80을 넘어 법인을 접을 때가 됐는데 요즈음은 그 일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좋은 분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얘기하는 게 엄청난 즐거움이에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그렇게 큰 즐거움인지 몰랐어요.”
즐거움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본능적이고 천박한 쾌락이 있고 얕은맛이 나는 즐거움이 있고 깊고 고급한 맛이 나는 즐거움이 있다. 나는 좀더 고급한 영혼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님은 이미 고매한 영혼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