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가짜뉴스와 쓰레기글 더미 속 ‘좋은 글’이란?

나는 매일 아침 좋은 글들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린다. 인터넷에서 가짜뉴스와 쓰레기 같은 글들이 범람하고 시궁창 같은 악취가 피어오른다. 한 인간을 처절히 짓밟는 글들을 볼 때면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짐승을 산 채로 찢어 먹는 광경이 겹쳐진다.

그런 글들은 왜 쓰여 지는 것일까. 겉껍데기와 찰나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본질을 외면하는 글들이다. 나는 가을국화같이 세상에 싱싱한 향기를 풍기는 글들을 얘기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좋은 글을 얘기하면 좋은 향기가 나오지 않을까.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나는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좋은 글이란 감동과 함께 그런 영향력을 주는 게 아닐까. 법정스님은 산골의 오두막에서 지내며 글로 세상과 소통했다.

법정스님의 글들을 보면 세상일에 현혹되지 않고 관조하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겨울 나무 숲을 걸으면 나무들이 소곤대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영혼과 근원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그런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의 글에 들어있는 곰삭은 진리와 철학이 오래 묵은 된장 간장 같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아침에 일어나 책을 펴고 좋은 글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좋은 글을 읽는 게 명상이나 기도같이 선비들의 수행방법이었다. 송시열은 맹자를 천 번 읽었다고 한다. 지금도 신문기자의 글쓰기 방법으로 맹자의 문장들을 필사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좋은 글들을 통해 나는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의미를 찾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나는 희망하는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어시간 선생님이 나누어준 프린트물의 영어 지문에서 한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인생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일단은 우회해서 가보라고 했다. 그게 안 될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우회하는 방법이 먼저였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지망대학을 한 단계 낮추었다. <차탈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소설 속의 한 문장이었다.

의사 출신 작가 크로닌의 글은 나의 직업관을 만들어주었다. 글 속 주인공인 의사는 교수나 개업의로서의 성공에 회의를 품고 탄광촌의 고용의사가 됐다. 광산에서 낙반사고가 발생해 떨어진 바위에 광부가 깔렸다. 의사인 주인공은 무너져 내리는 갱도 안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수술을 하고 광부를 구해 나온다.

작가는 의과대학 교수의 권위와 부를 거머쥔 성공한 개업의를 대비시켜 주인공의 모습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글의 주인공 의사는 다음에는 시골 마을의 의사가 됐다. 왕진을 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새벽에 돌아오면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잠들고 싶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에 환자가 또 생긴 것이다. 그는 부슬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가 진흙탕 길을 걷는다.

작가는 거기서 의사의 사명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주인공 의사는 한창 유행인 주식에 투자했다. 온 국민에게 주식열풍이 불던 시대였다. 주인공은 주식을 팔아야 할 순간에 진통을 하는 임산부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핏덩이 아이를 받느라고 주식매도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그 상황을 의사의 숙명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크로닌의 글을 읽고 나는 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지를 깨달았다. 의사였던 크로닌은 나이 마흔 무렵 시골마을의 다락방을 빌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챠트 용어 이외에는 한 줄의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나도 나이 마흔살에 크로닌을 따라서 작가 흉내를 내 보기 시작했다. 작가의 기본은 좋은 글을 읽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와 토스토옙스키의 글에서 영혼의 근원적인 탐색이 어떤 것인지를 맛봤다.

정서가 메말라 가는 사십대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은 글이 있다. 신기해서 쉰 살이 되던 해에 다시 읽어 보았다. 또 눈물이 흘렀다. 내 인생을 촉촉하게 해 준 그 글은 생케비치의 <쿼바디스>라는 소설이었다. 그 외에도 나를 만들어 준 좋은 글들이 많다.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에게서 한겨울 눈덮인 산 같이 맑은 문장들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아쿠다카와 류노스키의 <지옥변>을 읽으면서 예술지상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좋은 글이란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인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지금 바닷가에 방을 얻어놓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진실을 담은 글들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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