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강릉 강풍 속 ‘젊은 노인’과의 대화
심한 강풍이 불고 있었다. 밭에 있는 창고건물의 양철지붕이 날아와 도로 위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탄 세보레스파크는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가고 있었다. 바다가 여기저기 부풀어 오르고 그 위에서 흰 물결이 들끓고 있었다.
강릉에서는 강풍을 타고 불이 붙어 주택이 100채가 탔다고 뉴스가 전하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는 내가 묵는 주위가 온통 산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재난은 그렇게 때가 되면 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강풍을 뚫고 옥계의 산위에 있는 탑스텐호텔로 갔다. 바다를 내려다 보는 언덕위의 유리로 지은 호텔은 강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기저기 유리가 깨져 있었다. 영업도 정지된 상태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에서 내려 걷다가 바람에 몸이 휘청거려요.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세요.”
이런 날의 바람은 평생 기억 속에 각인될 것 같다. 오는 길에 신호등이 바람에 떨어져서 줄에 매달려 있는 걸 보기도 했다. 나는 강풍이 부는 날 특이한 목상(木商)을 만났다. 일흔 세월의 고개를 넘은 내 또래의 그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작은 산의 나무를 사가겠다고 해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몇 번을 만났는데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산악인이라고 했다.
칠십 나이에도 몸통 일으키기를 1000번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산악자전거부터 시작해서 스포츠를 평생 즐긴다고 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강풍이 부는 날 영업을 정지한 바닷가 언덕 위의 호텔 한쪽 구석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같은 또래라 그런지 그는 사업 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삶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부자집 아들이었어요. 젊어서부터 과감히 노는 인생을 택했어요. 우리나라에 아직 스키장이 없을 때 나는 벌써 용평에 가서 스키를 탔어요. 그리고 여름에는 하와이에 가서 윈드서핑을 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저는 돈이 생겼어요. 세계의 산이란 산은 다 타고 이름난 휴양지는 다 돌아다니면서 즐겼어요. 그런데 그렇게 놀면서 돌아다닐 때 휴양지에서 만난 사람을 다른 휴양지에서 또 보는 경우가 있었어요. 취향이 비슷한 거죠. 그런데 나는 노는데 그 사람들은 일을 함께 하고 있었어요. 낮에는 윈드서핑을 하고 밤에는 호텔방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예요. 아, 저렇게 휴양지에서 놀면서 일하고 살 수 있구나를 그때 봤죠. 부럽더라구요. 나는 놀기만 하는데 말이죠.”
같은 시대에 살았는데도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별에 살았던 사람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의 휴양지를 다니며 세월을 보내다가 40대 중반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하고 거지 신세가 됐죠. 마지막에는 밤에 뛰는 속칭 ‘나라시택시’까지 몰았다니까요. 나 혼자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파리에서 유학하는 딸 생활비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나무장사를 하면서 다시 일어섰죠. 이 나무장사가 저같이 산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에 맞는 일이더라구요. 가파른 산의 나무들을 잘라내고 다시 다른 나무를 심어 산을 새로 만드는 일이죠. 내가 산악자전거를 좋아하는데 일을 하면서 즐길 수도 있는 거죠.”
“젊어서부터 즐기는 인생을 선택하셨는데 노년이 된 지금 좀더 큰 사업을 못한데 대한 후회는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아버지 땅을 상속받은 형은 땅값이 올라 수천억을 가지고 있는데 아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해요. 큰 재산이 있어도 건강을 잃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는 망했었지만 다시 일어났어요. 큰 사업은 아니라도 나이가 먹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어요. 결론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젊은 날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가진 저는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음의 바닥을 보이고 약점을 드러내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인간은 그래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휴양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의 말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자기답게 사는 게 다음 세대의 세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