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돈황 가는 길 만난 ‘인연들’

돈황 가는 사막 길

나는 갑자기 돈황을 가보고 싶었다. 당의 현장법사와 신라의 고승 혜초가 진리를 얻는 과정에서 그곳에 묵었었다. 그들의 영혼이 수도했던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굴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메마른 사막도 보고 싶었다. 현장법사는 기행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인적은 물론이고 날짐승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천지구나. 밤에는 요괴의 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와 소나기처럼 퍼붓는구나. 갈증 때문에 걸을 수 조차 없다. 5일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해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모래 위에 엎드려 자꾸 관음을 염하였다’

그런 내용들이 모티브가 되어 <서유기>라는 중국소설이 탄생했다. 인도로 갔던 젊은 신라의 승려 혜초가 그곳 돈황에서 머물면서 정양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돈황을 향하는 몇 명의 여행객 틈에 끼어 비행기를 탔다. 그중에는 과부가 되고는 혼자 여행을 즐긴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여행을 하기 위해 돈을 번다고 했다. 봉급을 모아 여행을 떠난 교사도 있었다. 성형외과 의사도 있었다. 성형외과 의사는 방학 철에 여행을 떠나면 1억원 정도 손해가 난다고 했다. 그 무렵은 학생들의 쌍거풀 수술 등 성형외과의 호경기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떠난다고 했다. 인생에 무엇을 중점으로 두느냐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법원장을 지낸 아는 판사를 만났다. 군대 시절 같은 내무반에서 지낸 인연이 있었다. 군 시절 그는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자신을 개방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법원이라는 거푸집 속에 들어 가면서 직업의식에 말과 행동이 변했다.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나도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길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중국의 유원이라는 지역에서 돈황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차창 밖 사막은 자갈과 황토의 낮은 구릉들이 파도쳤다. 드문드문 가시 돋은 관목이 바닥에서 기고 있었다. 낙타는 입에 피를 흘리면서 그 가시가 섞인 잎을 뜯어 먹으며 사막을 건넌다고 한다. 기차에 임무를 넘겨 준 서너 마리의 낙타가 적막 속에서 저녁을 맞고 있는게 보였다. 낙타들은 고개를 숙이고 고요히 어스름 속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기차 다음으로 간 모래산은 낙타를 타야 했다. 우리는 낙타를 타고 물결치는 모래언덕의 사막을 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들은 반갑지 않은 손님들을 싣고 힘겹게 한발 한발 걷고 있었다.

동행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군 내무반에서 같이 지내던 시절 제대하면 판사가 될 그는 장밋빛 미래의 꿈에 젖어 있었다. 축복받는 결혼을 하고 대법관이 되는 꿈이었다. 그는 궤도 위에 놓인 열차처럼 예정된 인생길을 가는 것 같아 보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보는 그의 얼굴에는 성취감보다는 우수가 감돌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법원을 나왔다. 그가 길을 같이 가던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게 결단이 중요하더라구. 법대에서 폼을 잡던 재판장 자리를 사직하고 나올 때 사실 속마음은 제왕에서 서민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어.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그는 이번 여행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낙타에서 내려 바람이 만든 가파른 모래산을 걸어 올라가 봤다. 모래 위에 바람이 불고 그 위에 시간의 물결들이 새겨졌다. 니체의 말이 기억의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사막을 한발 한발 걸어가는 ‘낙타의 삶’을 얘기했다. 사막에 불시착한 생택쥐페리는 걸어가면서 결국 인간은 말라가는 물주머니라고 했다. 같이 사막길을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배낭에서 급히 오렌지 쥬스를 꺼내 마셨다. 그는 당뇨가 있어 인슐린 주사를 배낭에 넣어가지고 여행길을 떠났다고 했다. 스스로 주사를 놓으면서 홀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인슐린 주사를 맞은 그의 혈당수치가 너무 떨어져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세상을 구경했다. 위구르인, 회족, 한족 등 여러 민족이 사막의 좁은 오아시스 돈황에 모여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가로등 없는 어두운 거리를 걸어 야시장에 갔다. 말린과일, 고기, 빵들을 좌판 위에 놓고 팔고 있었다. 위구르인 부부가 호도와 건포도를 박은 과자를 들고있던 무쇠칼로 한조각 잘라 건네주었다. 입에 넣으니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흰 캡을 쓴 위구르인이 석탄불 위의 양고기꼬치를 이리저리 뒤집고 있었다. 위구르인 가족 다섯명이 볶음밥 한 그릇을 시켜 놓고 나누어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같이 다니는 그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서려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에게서 어떤 애잔함이 느껴졌다. 목숨을 건 마지막 여행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문이 들었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막고굴이었다. 오래 전 구도자들은 속세를 떠나 사막의 한가운데 자기의 무덤 같은 동굴을 팠다. 오아시스 강바닥의 점토와 갈대를 구해 동굴 내부 거친 사암의 벽에 흙을 이겨서 발랐다. 그리고 그 위에 촘촘히 불화를 그렸다. 굴속의 수도는 사회와의 결별이자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염불하면서 불화를 그리는 행위자체가 구도였는지 모른다. 그 굴 구석에서 혜초의 기행문이 오랜 잠을 자다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나는 켜켜이 먼지 쌓이고 어둠침침한 ‘17굴’이라는 장경동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동굴 입구 벽 가장자리에 혜초스님의 생각들이 담긴 단아한 글씨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혜초스님의 말없는 말을 듣고 싶었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겨우 형체만 갖춘…덜된 부처는 덜돼서 될 게 더 많아 보였습니다. 그 앞에 서니 나도 덩달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덜 된 부처’ 글/사진 홍사성 시인)

그 여행에서 돌아 온 얼마 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황토 바람이 휘날리고 뿌우연 초승달이 걸려 있는 사막 한가운데서 무엇을 얻었을까?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라는 혜초스님의 말을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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