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컴맹탈출 ‘야금야금 달팽이’ 기법
나는 요즈음 컴맹을 탈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혼자 공부하려니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앞에 앉으면 바로 속에서 주먹 같은 화가 치솟아 오른다. ‘로그인’이라는 빗장에 걸려서 들어갈 수가 없다. 한번 빗장이 풀려서 환호를 하고 다시 가려고 할 때 또 빗장이 걸린다. 비밀번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걸 되찾은 방법이 제시되면 그걸 따라가다가 또 길을 잃는다. 스마트 폰을 집어 던져 버린다. 앱을 실행하려고 해도 도중에 뭐라고 잔소리가 나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손녀도 능숙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 거의 장애수준이다. 그래도 그걸 익히지 않으면 기차표를 살 수도 택시를 탈 수도 없다. 음식점을 예약하거나 주문할 수도 없다.
엊그제 80대를 바라보는 선배가 내가 있는 실버타운에 놀러 왔다. 선배도 컴맹이 되지 않기 위해 주민센터에 등록하고 공부한다고 했다. 그 선배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대해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 점심도 먹지 않고 공부에 전념한다고 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고시준비 시절 책에 집중하느라 한 여름 궁둥이가 짓물러 팬티섬유와 붙은 채 굳어버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는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의 집중하는 성향은 노년이 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길이 있다는 생각이다. 평평한 둘레길을 꽃과 나무를 보면서 산책하듯 천천히 갈 수도 있다. 계곡 옆 길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다. 험한 바위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각자 취향이 아닐까. 나는 굳이 정상이라는 목표지점을 정해놓고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가다가 마지막에 주저앉아 쉬는 그곳이 목표였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그런 마음으로 컴맹 탈출 방법을 생각했다. ‘야금야금’ 기법을 쓰기로 했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가 간단한 기능 하나씩을 익히기로 했다.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앱 하나를 열어보면 몇 가지 기능이 뜬다. 그중 하나를 찍어보면 그 기능이 실현된다. 더 진전하지 말고 그걸 열번쯤 반복한다.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이 그걸 기억하게 만든다. 무심해지고 지겨움도 없어진다. 그게 오히려 작은 놀이로 변한다. ‘야금야금’이 내가 공부해온 방법이다.
40대에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일본어 성경을 구해놓고 매일 1분 정도 시간을 내어 단어 한개씩만 외우기로 했다. 성경 내용을 아니까 사전을 찾는 귀찮음이 없었다.
똑똑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닳게하듯 시간이 20년쯤 흐르니까 약간의 보람을 느꼈다. 일본 여행중에 길거리 간판이나 안내문이 대충 읽어지는 것이다. 역이름이나 메뉴도 알 것 같았다. 능숙한 대화나 어려운 책을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내 주제에 맞는 필요한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너무 목표를 높이 잡으면 힘만 든다. 능숙한 대화는 하지 못해도 그 정도면 됐다고 기준을 낮추니까 편하다.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실력이 없던 나는 수학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고난도 문제가 벅찼다. 나는 공부 방향을 바꾸었다. 내게 맞는 쉬운 수학 문제집을 구입했다. 나는 매일 몇 문제씩 내 식으로 풀었다. 그렇게 야금야금 준비한 수학이 고난도 문제가 나오는 학교 모의시험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학 본고사에서는 성공했다. 거의 다 맞췄다. 물론 대학도 내 수준에 맞게 한 단계 낮추었지만 말이다. 소년 시절 내 주제를 안 스스로가 기특하다.
고시 공부를 할 때도 비슷했다. 열매를 보지 않고 나무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법서를 매일 조금씩 읽었다. 한방울씩 떨어뜨려도 병에 언젠가 물이 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수재들은 빨리 합격했지만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니까 나도 붙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랭이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옛 어른들은 가다가 중지함은 아니감만 못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결과주의보다는 가다가 중지해도 안간 것보다 간 만큼 낫다고 생각한다. 안 하는 것보다 내가 스마트폰을 익힌 만큼 편해질 테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해 주면 달팽이도 기어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