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법 전문가 명함은 없어져도 될 듯”

법률상담이 들어오면 먼저 쳇봇에게 물어본다. 쳇봇이 훨씬 잘 안다. 변호사도 판사도 엄청난 판례가 입력된 인공지능이 솔직히 말해서 더 잘할 것 같다. 인간의 감성과 창의력을 내세우면서 변명하지만 40년 동안 법의 밥을 먹으면서 창의성과 감성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법관은 1000명 중 1명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면 과장일까.(본문 가운데) 

어려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남자아이가 노인이 되어 그 꿈에 도전하는 드라마가 있었다. 나도 중학교 시절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를 보면 부러웠다. 그 아이들은 2차원의 평면에 입체감이 나는 3차원의 산을 그렸다. 연필 선을 치면 꿈틀거리는 근육이 종이 위에 떠올랐다. 나는 머리속에 어떤 관념만 있을 뿐 묘사력이 빵점이었다.

어른이 되어 놀이를 하는 한 모임에서였다. 색연필과 동그랗고 작은 가죽 조각을 하나씩 나누어지면서 그 안에 이름과 간단한 그림을 그려 이름표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대부분이 알록달록 색칠해 가면서 예쁘게 만들었다. 나만 바보였다.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했다.

음악으로 치면 심한 음치고 운동으로 치면 몸치라고 할까. 그렇다고 머리속까지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비밀정원에 들어선 아이같이 여러 가지 환영을 보는데 그걸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면서 무능의 극치인 내가 요즈음 ‘내 나름 화가’가 됐다. 묵호 등대로 가서 그 아래 옛날 달동네와 넓게 드러누운 바다를 보았다. 그 광경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그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는 그걸 친구인 탤런트 정한용에게 평가해달라고 카톡의 단톡방에 올렸다. 중학교때 미술반인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만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냉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단톡방에는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였던 친구도 있었다.

몇 시간 후 정한용에게서 이런평가가 왔다.

‘와~~그림 참 좋아. 그림이 말을 하네. 틈틈이 그리면 글만큼 좋은 누적이 되겠어. 나중에 책에 삽화로도 최고네.’

또 다른 단톡방의 친구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화가를 아버지로 둔 아들의 입장에서 엄변 그림은 날로 발전해 나아가는 게 눈에 띄어. 나도 한번 짬을 내어 그림에 도전해 보고 싶네.’

그런 평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속임수를 쓰거나 장난을 친 것 같은 찜찜한 마음이었다.

나는 요즈음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는다. 평생 사진만 취급했던 사진기자의 아들인 나는 어깨 넘어 아버지의 촬영을 많이 구경했다. 노출부터 구도까지 아버지만의 노하우가 많았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카메라는 전문가인 아버지의 재주를 훨씬 뛰어넘었다. 수평 수직의 촘촘한 구분선을 만들어주고 찍어야 할 목표에 노란 조준점을 찍어 주었다. 명암부터 질감까지 인공지능이 모두 해결해 준다. 그런 사진을 인공지능은 다시 리마스터해 준다.

​나는 그 사진 속의 대상을 재해석하기 위해 몇 종류의 앱을 사용하여 이중삼중으로 재가공한다. 색감을 바꾸기도 하고 일부분을 없애기도 한다. 연필화로, 펜화로, 파스텔화로 유화 등등으로 바꾸어 본다. 바탕 종이의 질감과 색을 바꾸기도 하고 부드러운 테두리나 윤곽까지 손본다.

여러 앱속의 인공지능은 엄청난 기능을 수행해 준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이 탄생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그림을 칭찬해 준다. 탤런트 정한용은 그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과연 그 그림은 생명력을 가지고 창조된 것일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고정관념 속에서 기계로 짝퉁을 만들어낸 범죄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검은 물처럼 들어와 주위를 적시고 있는 걸 실감한다. 인공지능이 전문 분야를 깊이 잠식했다. 우리 시대는 암기력이 평가의 기준이었다. 이제는 그게 무의미하다.

법률상담이 들어오면 먼저 쳇봇에게 물어본다. 쳇봇이 훨씬 잘 안다. 변호사도 판사도 엄청난 판례가 입력된 인공지능이 솔직히 말해서 더 잘할 것 같다. 인간의 감성과 창의력을 내세우면서 변명하지만 40년 동안 법의 밥을 먹으면서 창의성과 감성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법관은 1000명 중 1명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면 과장일까. 대법원 판례 하나만 찾으면 그걸 거푸집으로 해서 사건 하나를 떼는 게 내가 본 법원 풍경이기도 했다. 모든 분야가 인공지능을 당해내지 못하는 시대가 닥친 것 같다.

이제는 법의 전문가라는 명함은 없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림을 만들면서 생각해 보았다.

엄청난 훈련으로 일등저격수가 된 사람이 있었다. 반면에 정밀한 조준경을 구입해 그걸 부착한 총으로 정확히 목표물을 맞추게 된 사람이 있다. 저격기능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저격수라는 전문타이틀이 맞는 것일까. 대패질을 귀신같이 하는 장인 목수가 있었다. 초보로 목공을 배우는 사람이 우연히 정밀한 성능을 가진 기계 대패를 이용해 나무를 더 잘 다듬었을 때 장인의 타이틀은 무엇일까.

산업혁명시대 기계의 발명으로 전통적인 장인이 존재의미를 잃었다. IT시대에 나는 전문가 자격을 반납해야 할 위기에 서 있다. 산업혁명시대 기계파괴운동이 일어났지만 시대의 물결에 삼켜져 버렸다. 앞으로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인공지능으로 간단한 그림을 만들어보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있다. 그건 ‘자연의 재해석’이다. 문학에서 자연을 내면의 감정 안으로 끌어들여 변용시키는 것 비슷하다고 할까. 불완전한 인간의 신비로운 마음의 떨림 그건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중국의 현자인 임어당의 글에서 “모자라고 불완전해서 인간”이라는 걸 읽은 적이 있다. 성경도 지혜를 상징하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다. 섭리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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