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창살 없는 인생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실버타운에서 여러 종류의 노인을 만났다. 왕년에 잘 살았고 경찰을 했고 뭘 했고 해서 싸우는 수가 있다. 과거 정권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분이 있다. 80대가 넘은 지금까지 에너지가 왕성한 것 같다. 왕년의 경력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동향을 주변 사람들의 단톡방에라도 올려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남 없이 우리들은 과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평범한 노인인 점을 인정하고 과거에 묶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 것 같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인생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왕자병에 걸려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착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 별 볼 일 없는 내 주제를 아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
피라미가 상어가 되려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내 주변에 부자인 친구도 많고 출세한 친구도 많았다. 나는 그들과 똑같아야 한다고 착각했다.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정신의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때로는 ‘나 같은 게 뭘’ 하는 절망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부정과 의심의 영이 내 영혼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볼 때 부정적인 면에만 눈이 가고 비판적이었다. 꽃을 봐도 나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굳이 뿌리를 얘기하고 거기에 묻은 흙을 지적하면서 똑똑한 척 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꼭 이면을 떠올리면서 의심했었다. 악마의 영이 나를 깊은 정신적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잠시 석방되는 순간을 맞이했던 적이 있다. 장기 직업장교가 되어 최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하얗게 눈이 덮인 철원평야에 지은 작은 단층집을 관사로 배정받았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의 집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에 하얀 플라스틱 욕조가 있는 집이었다. 나는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에서 자랐다. 재래식 화장실에 얇은 판자와 유리 그리고 창호문으로 된 다다미 방을 가진 집이었다. 집에서는 목욕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목욕을 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을 가진 집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장교관사가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관사의 욕조에서 나는 짜릿한 행복을 느꼈다. 행복이 겹쳐왔다. 내게 배정된 군용 찝차였다. 그 어떤 고급 외제차보다도 나는 그 차를 타고 다닐 때 행복했다.
지금도 봄밤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전방의 군용도로를 달릴 때의 아늑했던 삶의 질감이 마음의 오지에 그대로 달라붙어 있다. 군복을 단정하게 입고 권총을 차고 전방을 순찰하면서 나는 열등감의 정신적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었다.
변호사를 하면서도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의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할까. 매달 돈을 벌어서 가족이 생활을 해야하고 아이들 교육을 시켜야 했다. 절대적으로 돈에 목이 말랐다.
수시로 돈이라는 미끼가 달린 함정이 나를 유혹했다. 그 미끼를 물면 나는 깊은 함정에 빠져 갇히게 되는 것이다. 미끼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현혹되지 않기가 정말 힘들었다. 돈 걱정을 하지 않고 5년만 편안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려서 가난은 돈 없는 불편을 견뎌내는데 도움이 됐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은 하지만, 내게 고통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50대 중반쯤 짜릿한 행운의 기회가 있었다. 큰 사건을 맡아 처리하고 대기업으로부터 비교적 큰 수임료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 돈이면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5년간은 편히 글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감사해서 그 돈을 준 회사의 사장을 찾아가 큰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높은 담과 철창이 있는 감옥만이 감옥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보다 더한 정신적 감옥이 있다. 내남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살 없는 그런 인생의 감옥 속에 들어앉아 있는 건 아닐까.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선을 어둠에서 돌려 빛을 봐야 하지 않을까. 자기 그릇의 크기를 빨리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는 분량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