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길고양이와 강아지 삼형제

길고양이

어둠이 짙은 산자락 굽은 길을 돌아서 실버타운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길고양이가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동시에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고양이는 인간에게 귀여움을 받고 잘 먹고 잘 사는데 그 들고양이는 태어나서 혼자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한번은 가죽만 남은 바짝 마른 고양이를 봤다. 다음 번에 만나면 먹을 걸 가져다 주려고 했는데 그 후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저녁 무렵 실버타운에서 바닷가로 가기 위해 차로 내려갈 때였다. 길가에 작은 강아지 세 마리가 나란히 서서 간절한 눈으로 내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마리가 종류가 다 달랐다. 이름은 모르지만 모두 고급종인 것 같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들 같았다. 강아지들 눈빛은 내 차를 보면서 “우리들을 살려주세요” 간절히 사정하는 것 같았다.

데려다가 돌보아 주고 싶었지만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입장이었다. 내 시간을 내서 목욕시키고, 먹이고, 사랑을 베풀 자신이 없으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 다음에도 길에서 그 강아지 세 마리가 보였다. 종류가 달라도 흩어지지 않고 형제같이 붙어 다녔다. 그 강아지들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뒤 저녁 시간 그 강아지들을 다시 만났다. 세 마리가 깨끗하고 밝은 표정으로 앞에서 걸어가는 한 여성을 쫄랑쫄랑 따라가고 있었다. 강아지들이 구세주를 만난 것 같다. 마음이 흐뭇했다.

들고양이와 강아지의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들고양이들은 뼈와 가죽만 남아도 인간에게 사정을 할 줄 모른다. 그냥 무심히 밤하늘 별을 보며 견딜 뿐이다. 강아지들은 자신을 굽히고 인간을 향해 간절히 기원했다. 그 기원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인간도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에 파킨슨병을 앓는 노인이 있다. 쨍쨍 내려쬐는 햇볕 아래서 그가 걷고 있었다. 거의 서 있는 상태같아 보였다. 첫발이 떼어지지 않는 것 같다. 혼자서 “하나 둘 셋 넷”구호를 부르다가 간신히 발을 떼곤 한다. 보폭이 10cm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깨에 골프채 하나를 메고 있었다. 매일 실버타운 내에 있는 그라운드 골프장으로 운동을 가는 것이다. 가까운 골프장이 그의 걸음으로는 10리 100리 같을 것이다. 하도 보기가 딱해서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괜찮습니다”라면서 사양했다.

그는 걷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매일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실버타운 내의 목욕탕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욕조 앞에서 걷지를 못하고 휘청거렸다. 옆의 다른 남자가 그의 양손을 잡고 한발 한발 도와주는 모습이었다. 그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매일 결사적으로 목욕을 하는 것 같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혼자였다. 자신의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밥을 먹었다. 멀리서 봐도 얼굴은 푸른 빛이 비칠 정도로 창백하다. 그가 두 번이나 자기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쓰러져 있는 걸 실버타운의 직원이 발견했다. 실버타운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길 걸 권해도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가족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가진 재산 때문에 돈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복지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길가의 들고양이의 환영같은 모습을 보면서 섬뜩할 만큼 무서운 삶의 의지를 느꼈다. 그런 고통을 겪고 있어도 그는 누구에게도 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늙음과 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시 제대로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해 할까. 그 행복은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불행해져야 비로소 행복은 눈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폐섬유증을 앓는 노인은 숨을 쉰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른다고 했다. 귀가 나빠진 노인은 남과 소통이 안된다고 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했다. 공동식당의 내자리에서 나보다 먼저 밥을 먹고 가는 노인은 물체들이 희미한 안개 속의 나무같이 보인다고 했다. 그들은 숨쉬고 보고 듣고 걸을 수 있는 그 자체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은혜인지를 실감한다.

고민이 많다고 하더라도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이라는 설교를 40년 전 교회에서 여러번 들었다. 젊을 때는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늙어보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글을 쓰다보면 모든 게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분이 있다. 몸의 한 부분에 상처가 나면 온통 거기에만 신경이 쓰이듯 돈이 없을 때 나도 그랬다. 이제야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안다. 흔히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가볍게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돈이 없어서 자살하고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병이 들었다고 자살한다.

나는 실버타운의 병든 노인을 보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병자가 되어도 매일매일 병자로서 소중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아닐까 하고. 물론 그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천상병 시인은 가난과 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어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왔다가 간다고 하나님께 보고했다. 중국의 현자 임어당의 글에서도 같은 내용을 읽었다. 그분의 뒤를 기쁘게 따라가는 귀여운 강아지 세 마리의 모습이 환영같이 내게 다가온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