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어머니의 기도 “아들아, ‘진국’으로 살아다오”

“나도 모난 성격이었다. 쉽게 분노하고 수시로 남과 싸웠다. 사회성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배운 ‘진국’이라는 단어는 내면에서 돌고 있었다. 장사를 해도 남을 속이면 속이 편하지 못하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도움을 받으면 그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본문 가운데) 

틀어놓은 노트북의 화면 속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퇴직 여교수가 말을 하고 있었다.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 힘들던 시절 도움을 받았던 사람을 기억하고 전화 한 통이라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진국이라고 하죠.”

좋은사람과 나쁜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강의하는 것 같았다. ‘진국’이라는 단어가 물방울 같이 마음 수면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입에서 여러 번 나왔던 말이다. 어머니는 사람은 ‘진국’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진한 국물 같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관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술자 두 명 정도를 두고 행길가에서 편물점을 했었다. 이따금씩 기술자들이 털실을 한 줌씩 빼돌려 도시락에 숨겨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모두들 헐벗고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작은 털실 몇올에도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사람은 ‘진국’이어야 한다고 했다. 물질 자체보다 정직하지 못한 데 분노했다.

나는 추운 겨울밤 냉기 서린 방에서 밤을 새면서 주문받은 쉐타를 짜는 어머니를 보면서 컸다. 대나무 바늘로 실의 한코 한코를 고른 크기로 정확하게 만들고 그것들을 정교하게 이어야 줄이 되고 그 줄이 가로세로 퍼즐같이 꼭 맞아 들어야 면이 됐다. 그 면들을 굵은 바늘에 꿴 실로 앞면과 뒷면 그리고 팔 다리들을 코와 코가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정확히 연결시켜야 했다. 한 코라도 부실하게 꿰면 작은 구멍이 나거나 뒤틀린 불량품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수제품 쉐타를 세상에 내놓았다. 더러 실을 빼돌리거나 무게를 속였다고 트집을 잡아보는 손님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때면 나는 진국으로 살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물건을 팔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하는 진국이란 그런 것 같았다. 어머니는 기억력이 좋았다. 서너살 때 등에 업혀 북간도의 용정으로 간 걸 기억하고 있었다. 용정의 마을에서 굶주린 어머니에게 불쌍하다고 삶은 감자 한알씩 주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6.25전쟁 시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사람들을 학살할 때를 기억했다. 수염이 더부룩한 늙은 인민군이 형을 업은 엄마를 끌고 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엄마는 죽음을 감지했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늙은 인민군이 한 마지막 말을 평생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 출신인데 공산주의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간 사람이오. 서울로 내려와 아무리 애써도 가족을 찾을 수 없었소. 아주머니와 애를 보니 내 가족이 생각나오. 돌아가시오.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사시오.”

어머니는 그렇게 풀려나 살아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휴전 무렵 피난 가서 살던 서정리역 부근의 차씨마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구마 한 알, 볏짚 한 단을 얻은 인정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초가집 구석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마웠던 사람들을 차곡차곡 기억의 서랍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내게 돈을 주면서 죽은 후에 한 사람을 찾아서 전해주라고 했다. 해방 다음해 새색시 때 부엌에서 일을 하면 앞집 외아들이던 꼬마가 와서 옆에서 놀다 가곤 했는데 그때 정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용돈을 전해주라고 했다.

어머니의 장사를 치른 후 앞집 꼬마였던 분을 찾았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면서 돈 봉투를 전할 때 그 노인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런 게 어머니가 말하던 ‘진국’이라는 의미구나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도 모난 성격이었다. 쉽게 분노하고 수시로 남과 싸웠다. 사회성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배운 ‘진국’이라는 단어는 내면에서 돌고 있었다. 장사를 해도 남을 속이면 속이 편하지 못하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도움을 받으면 그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한 일년 동안 국가기관에서 책임자의 보좌관을 한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내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모셨던 상관에게 눈치도 없고 행동도 느려터진 나를 왜 보좌관으로 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진국이니까”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감사했다.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었던 것 같다. 하늘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One comment

  1. 네 모난 진국이네요. you are unique. You are only one in this world. 어머님도 진국이시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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