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저 길, 걷고 싶다
쨍쨍 내려 쬐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굴이 하얗게 바랜 그 노인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입으로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부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 보면 발이 한 두걸음씩 떨어지곤 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그의 얼굴에서는 섬뜩한 삶의 의지가 엿보였다.
매일 우면산의 산자락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내가 올라갈 때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나무기둥 같은 그 다리를 끌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야산을 오르내렸다. 한번은 그가 산길 흙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 엎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일어서서 또 걸었다. 어떤 때는 얼굴에 넘어져서 생긴 푸른 멍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야산을 오르는 것은 보통 사람이 히말라야라도 오르는 것 같은 의지와 에너지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한번은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원래 건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다리에 마비가 왔다는 것이다. 의사는 신경이나 다리의 근육에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다리는 기능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 의지의 사나이가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갑자기 중풍을 맞은 대학 동기가 있다. 팔다리가 마비됐다가 조금씩 풀려 지금은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고 연락해 왔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재활병원에 와 보니까 나 같은 환자가 수백명이 있어. 재활을 위해 하루에 세 시간 이상씩 운동을 해. 여기 사람들 소원은 흔들리고 쓰러져도 혼자 걷는 거야.”
대단한 운동시간과 운동량이다. 그 목적은 흔들리고 쓰러져도 혼자 걷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산에서 뻐쩡 다리로 혼자 내려오다가 쓰러지는 남자도 파킨슨병에 걸려 한걸음이 천리 같은 노인도 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가.
걷지 못하는 원인은 병만이 아니다. 법이 걷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호사인 나는 20년 이상 독방에서 혼자 감옥생활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작은 철창을 통해 교도소의 높은 담벽이 보이고 그 아래 먼지 낀 잡초들이 보여요.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면 그 담벽 아래 흙길을 걸어보고 싶어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까운 곳인데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게 감옥입니다.”
몇년 후 그가 석방이 되고 나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환하게 펴지고 신이 나 있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성남에 쪽방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저녁이면 꼭 산책을 나가요.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신문지가 바람에 날리는 더러운 뒷골목인데도 나는 너무 행복해요.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기 때문이죠. 감옥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기쁨을 모를 거예요.”
하얀 것은 검은 것과의 대비를 통해 자신을 알고 더욱 하얘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걷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나의 행복을 깨달았다.
10여년 전 일을 보러 여의도에 갔다가 한강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강물이 마음을 열고 내게 뭔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강물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두워지는 호젓한 강가를 계속 혼자 걸었다.
밤이면 강가의 모텔을 찾아 들어가 자고 다음 날 아침이면 또 물안개 피어오르는 푸른 강가 길을 걸었다. 노란 들꽃이 가득한 여주 강 옆의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행복했다. 존재와 비존재가 섞여 드는 저녁 어둠이 좋았다. 그렇게 충주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걷는 행복을 알았다. 행복할 때 사람들은 그 행복을 느끼기 힘든 것 같다.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불행해져야만 행복을 알아차린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실감해 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해지는 길은 아닐까.
20대 젊은시절의 꿈 하나는 배낭을 지고 동해바닷가를 걸어서 방랑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되어 한적과 여백을 즐기려는 요즈음 그 꿈을 조금씩 실현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