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삼성가의 손자’와 이병철, 그리고 스티브 잡스

1983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호암 집무실에서 만난 호암 이병철과 잡스. 당시 이병철은 타계 4년전인 일흔셋, 잡스는 28세였다. 당시 호암은 노구를 이끈 채 삼성과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는 필생의 도전에 나선 때였다.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된 새파란 젊은 사업가였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손자라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다.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과 당시 황진이라는 역을 맡았던 여배우 사이에서 난 자식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그 여배우와 아이를 미국에 가서 살게 했다. 성인이 되고 다시 아버지가 된 삼성가의 손자의 호적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백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를 삼성가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소송을 했었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나는 재벌가의 얼음같이 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찾아간 아들을 외면했다. 99.9999%의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와도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이복형제들의 경계심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적당히 거액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변호사인 내게도 모략이 왔다. 나는 기어이 삼성가의 가족으로 입적시켰다. 한국에서 이병철 회장의 친손자라는 혈통은 또 다른 명예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역을 맡은 탤런트는 빙의라도 된 듯 신들린 연기를 했다. 드라마에서도 입적된 이복형제와의 면도날 같은 대립이 스토리의 중심에 있었다. 재벌가 회장은 덕으로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식들이 치열하게 실적 경쟁을 하게 했다. 재벌가의 오너인 회장이 어느 순간 안면마비로 침을 흘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줌을 싸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혼자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드라마에서는 제시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이병철 회장이 생의 마지막에 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절두산성당의 박희봉 신부에게 신에 관한 스물네가지의 질문을 보내고 대답해 달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은 신이 존재하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신이 기업가로서 자기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기독교인이 많은 동유럽국가에 왜 공산주의가 자리잡고 있는지, 두집 건너 교회가 있을 정도라는 우리나라에 어째서 범죄와 시련이 많은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등 사회현상을 전반적으로 성찰하는 질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회장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그가 신을 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과 기업인으로서의 고뇌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다고 했다. 세계적 기업을 탄생시킨 경영의 신도 마지막에 구한 것은 영혼과 평안이었던 것 같다.

미국의 부자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썼다는 글이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걸 봤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독백의 형태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즈니스의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닥쳐오는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끝없이 부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같은 비틀린 개인만을 남긴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선사했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였다. 잃어버린 물질적인 것들은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한번 잃어버리면 절대 되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이병철 회장도 혼수상태에서 유영하면서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죽어본 그는 신을 직접 확인하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 속의 부자처럼 세상에 있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본인의 깨달음을 전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내가 입적시킨 이 회장의 손자가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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