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노년에 혼자서도 행복해지는 방법
실버타운에서 친해진 퇴직한 교수 부부가 있다. 그 부부가 저녁으로 돈가스를 사겠다면서 나를 초대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내가 공동식당에서 보이지 않으면 혹시 방에서 고독사를 했나 걱정부터 한다. 그 부부와 실버타운 내 식당에 가서 돈까스를 주문하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70대의 부인에게 인사겸 해서 물었다.
“오늘은 어떤 즐거움이 있었습니까?”
“황혼에 젖어가는 바다를 보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어요. 구내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사서 하나씩 먹는데 남편이 너무 맛있어 해요. 이렇게 저녁에 이웃과 만나 돈까스를 먹는 것도 즐겁구요. 오늘은 정말 즐거운 일이 있었어요. 40년 전쯤 제가 성모병원에서 간호사를 할 때 친했던 후배와 우연히 연락이 됐죠. 간호사를 하던 후배는 수녀가 됐더라구요. 전화로 방 안에서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는데 정말 즐거웠어요.”
옆에 있던 80대의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불행하지 않으면 생활이 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 부부는 어린아이같이 맑고 명랑하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행복하지만은 않다. 퇴직을 했고 나이를 먹었고 부인은 나같이 눈이 아프다. 공부 때문에 결혼이 늦어진 부부는 아이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순간순간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부부는 행복하다. 그들 부부의 행복이 내게 전염되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어떻게 행복했지 하고 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해 뜰 무렵 어둠 짙은 바다에는 오징어배의 불빛들이 별같이 흩어져 반짝거린다. 어둠 저쪽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스며 나오고 그 붉은 빛 끝에 파란 기운이 서린다. 파란 기운이 조금씩 깊어진다. 새벽 바다는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준다. 날이 밝으면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맨발로 인적없는 해변을 걷는다.
산책을 마치고 나면 실버타운의 목욕탕에 가서 따뜻한 물이 차 있는 욕조에 몸을 담근다.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를 한다. 내가 정한 하루분의 글쓰기를 마쳤을 때 하루분의 작은 성취감을 느낀다. 노년은 쉼과 여백이 허용된 시간이다. 혼자 침대에 누워 창밖의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빈둥거린다.
빈둥거림은 이제는 노년인 나의 특권이다. 수첩에 나는 ‘빈둥’이라고 해야 할 항목을 만들기도 했다. 악보에 쉼표가 있듯이 인생에서 순간순간 스스로 쉼표를 찍어야 하는 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매일 혼자 있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찾아서 즐긴다.
더 이상 불필요한 일, 소중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노년이란 낙엽이 몇 장 남지 않은 겨울을 맞는 나무가 아닐까. 현세와 내세 사이에 틈을 두는 게 지혜인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매일 행복할 수 있는 이유를 점검한다. 생업인 변호사로서의 일이 조금은 남아 있어서 행복하다. 젊어서는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밥과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하기 싫은 일도 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는 감옥에 있는 열네살 아이들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었다. 아이들은 장난삼아 문이 잠겨 있지 않은 차에 들어가 호기심으로 차를 몰고 가다 콘솔박스에 들어있던 동전을 들고 가버렸다.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법은 특수절도라고 했다. 죄의식 없이 여러번 그래서 구속이 된 것 같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왔고 아빠는 문맹이었다. 말도 글도 할 수 없었다. 돈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탄원서를 써 줬다. 부모도 만나보고 사건기록도 구해서 읽었다. 변론서를 품은 탄원서였다. 그런 일도 노년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노년의 글쓰기도 즐겁다. 작은 원고료로 손자 손녀 용돈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실버타운의 노인부부에게 돈까스를 대접받는 것도 즐겁다. 삼겹살을 사겠다는 분도 있다. 같이 목공을 배우자는 분도 있다.
낮잠을 잘 수 있어서 행복하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감사하다. 늙어서도 혼자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진부한 일상이 중요한 삶이라고. 그게 모여서 인생이 된다고 말이다. 그 속에서 얼마나 소소한 즐거움을 캐어내는 일들이 행복해 지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