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⑮] ‘김대중 내란사건’ 관련 정치공작?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앞 대학생 시위. 당시 10만여명이 운집해 신군부 반대 시위를 벌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잠시 들어가 보았던 정보기관은 외눈박이였던 내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거기 보이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역사라고나 할까. 그걸 보면서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이나 이념적 지향이 달라지기도 했다. 35년 전 나만 본 사실을 이제는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노태우 정권이 되자 ‘5공 청산’ 움직임이 일었다. 부하에게 정권을 줄 수는 있어도 친구와 권력을 공유하기는 힘든 것 같았다. 출신이나 지지기반이 같기 때문에 차별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것 같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귀양 가고 ‘5공 청문회’가 다툼없이 여야 합의로 결정됐다.

청문회의 핵심은 김대중내란음모죄의 배경에 있는 정치공작을 밝히자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그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들이 답변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보안사령부 장교로 김대중 구속을 주도했던 이학봉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수석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다른 보안사 장교들은 장군이 되어 있었다. 담당 군검찰관이었던 장교는 장군이 되어 있었고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법무장교들은 제대를 하고 중견 검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유일한 국외자였다. 그들만의 회의에서 그들의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안사령부 소속 장교가 그들이 본 당시의 시국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1980년 봄이 되면서 투옥되거나 제적당했던 운동권 학생들이 돌아와 전국대학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이 김대중의 정치조직인 국민연합과 연계가 됐습니다. 80년 5월 14일 정오 서울 시내 대학생 7만명이 일시에 교문을 뛰쳐나왔고 5월 15일 서울역광장 앞에는 10만명의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시위대에 의해 경찰차가 불타고 시위는 야간까지 계속 가열됐습니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노사분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강원도의 사북탄광에서 폭동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김종필은 대권 주자로서 극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제도권에서 이미 우위를 선점하고 있던 김영삼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학생과 재야세력을 동원하여 장외투쟁에 나섰습니다. 재야강경세력과 김대중씨가 이끌고 있던 국민연합은 극단적인 반정부투쟁을 선동했습니다. 국민연합이 역점을 둔 것은 ‘대학생의 조직화’였습니다. 복학생들을 국민연합의 핵심요직에 임명하고 전국대학 내 그들의 거점을 형성했습니다. 국민연합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 세력의 잔당’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국민연합의 목표는 학원소요를 배후조종해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획득하는 ‘민중혁명’이라고 우리는 봤습니다.”

보안사령부 장교가 미리 준비한 자료를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김대중은 인하대 강연에서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 모두가 혁명가다’라고 했습니다. 서울대 강연에서 김재규를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동국대 강연에서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은 ‘혁명’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내란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10만명의 시위대가 밤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 차량들을 빼앗아 몰고 다녔습니다. 서울 시내 중심가는 시위대에 장악되고 지방 대도시에서도 수만명의 학생들이 시가지를 누비며 폭력시위를 벌였습니다.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반정부 봉기를 노골적으로 선동했습니다. 당시 국민연합이 발표한 선언문을 보면 민족적 결단, 민족통일을 말하면서 그들의 목표가 유신체제를 청산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사의 결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결전은 민중혁명을 말하는 것으로 보안사령부는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헌법은 군이 국가의 안전과 질서를 책임지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민주체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내란을 주도하는 자들을 수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안전기획부 수사관이 의견을 제시했다.

“저는 당시 북한 동향에 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다음날 북한은 전군에 ‘폭풍5호’를 발령했습니다. 동구권을 방문 중이던 북한의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은 방문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해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군은 통일에 대비해 정치,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전쟁물자의 전시 수송대비훈련이 대대적으로 실시되고 곡산, 세포지역에서는 차량 천대를 동원한 군단급 훈련이 실시됐습니다. 비무장지대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과 미군 간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서울 북방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무장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었고 무장간첩선이 포항만으로 침투했습니다. 일본의 내각조사실이 우리에게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첩보를 전했습니다. 일본 고위관리가 중국 방문중에 북경당국으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당국은 그 첩보를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공식적으로 통보해 주었습니다. 저희 안전기획부는 김일성이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김일성은 브레즈네프 서기장과의 비밀회동에서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시민들이 봉기할 경우 지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 3월 20일자 <워싱턴포스트> 칼럼은 소련은 세계전략의 하나로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미국의 관계와해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안전기획부 수사관이 잠시 말을 쉬었다 계속했다.

“당시 우리는 신현확 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이런 정보들을 보고 했습니다. 신현확 총리는 김종필 공화당총재와 김영삼 신민당총재에게도 북한의 남침위협 첩보를 알려주었습니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초당적 협조를 당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총재는 남침위협을 ‘조작’이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첩보를 보내준 일본의 내각조사실은 거대한 조직을 가진 일본의 정보기관입니다. 당시 북한에 관한 정보는 공산진영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내각조사실 정보가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일본이 미국과 우리 정부에 보낸 날짜까지 명시된 정보를 한국의 야당총재가 조작이라고 해버린 겁니다. 군부가 정치적 이용을 위해 그런 정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안전기획부에서는 학원소요와 배후세력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고는 파국을 막을 수 없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김대중을 직접 수사한 사람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광주사태의 기폭제가 된 조선대학의 시위주동자와 김대중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김대중과 대학시위를 주도하는 복학생들이 만나고 자금을 지원받고 폭력시위를 의논했다면 내란음모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김대중과 직접 대하는 제가 파악한 사실의 보고가 상부에 전해졌고 상부에서는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수사의 밑그림을 그렸던 장본인입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강한 확신인 것 같았다. 내가 본 장면이었다. 그때 그들의 주장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어둔다. 내가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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