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③] “조직적이고 방향성과 이념적 지향이 있는 듯했다”

“숙청은 좌익들에게는 이념의 실현단계일지 모르지만 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반공은 이념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절박성에서 나온 겁니다.”(본문 중에서)

나는 군부대 같은 곳 앞에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회색의 높은 담이 보였다. 중간쯤에 대형 철문이 있고 그 앞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가죽졈퍼에 감색 헬멧과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M16으로 무장한 특수부대원 같은 존재들이 서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옆에서 한 남자가 나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다른 세계였다. 여기저기 장방형의 두꺼운 콘크리트 건물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하는 남자를 따라 그중 한 건물로 들어갔다. 병원 같은 느낌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배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이런 말을 했다.

“정보기관에 들어오셔도 될 분인지 인성검사 IQ검사 등 여러 정신적 요소를 검사할 겁니다. 정보요원이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영화나 소설에서 보듯 음모적이고 냉혈한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인간들은 정보요원으로서는 부적격입니다. 상식적이고 정직하고 바른 인간만이 다른 사람들 마음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귀중한 정보를 구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과학적인 인성검사를 통해 정보요원이 될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곳에서 이틀 정도 여러가지 세밀한 검사를 받았다. 나는 다시 어떤 건물의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전면에 대형 스크린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스크린으로 시선을 향했다.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스크린에 의자에 묶여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극도의 전기고문이 그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화면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보요원이 적에게 잡히면 맞이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잠시 후 그 화면이 사라지고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어둠침침한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간단한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는 조직을 배신하고 이중 첩자 노릇을 한 요원이 있습니다. 그는 조직이 자신의 배신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은 그에게 다시 적지에 침투하라고 지령을 내렸죠. 그가 비행기를 타고 적지에 들어가 뛰어내리는 순간입니다. 화면을 보시죠.”

낙하산 줄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잘려져 있는 장면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화면은 배신자의 조용한 처단을 알리고 있었다.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저희 조직에서 북한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하사관들을 많이 북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그들의 공로에 대해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희 조직은 그들을 임시 장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무를 주고 비행기에 태워 모처로 가서 하강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메고 있는 낙하산은 이미 줄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입을 영원히 막고 대신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국립묘지에 묻히게 했습니다. 정보기관이란 그렇게 교활하고 비정한 곳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조직에 이용당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이 소멸하고 스크린이 천정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 자리에 유령같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녹음기 하나를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놓았다. 역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그림자 인간인 것 같았다. 그가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안에서 온갖 소리들이 들끓었다. 강한 톤의 사투리들이 많았다. 외마디 같은 소리도 있고 악을 쓰면서 뭔가를 저주하는 것 같은 음성도 들렸다. 남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녹음은 부촌으로 알려진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에서 일하는 파출부들이 성남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하는 말들을 녹음한 겁니다. 또 이 녹음 안에는 택시기사들이나 바닥 사람들의 불평이 광범위하게 수집되어 있습니다. 파출부들은 부자집 여자들을 증오합니다. 그들은 뼈가 빠지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 강남의 사모님들은 전신 맛사지다 쇼핑이다 해서 호화사치의 극을 이룹니다. 게다가 없는 사람 앞에서 교만하고 건방을 떱니다. 거기서 적개심과 증오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 졸부들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 조직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뇌물이나 부동산투기로 부자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장관을 그만둔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집에 차를 두 대나 굴리고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매일 호텔에서 만나곤 합니다. 그런 삶을 살려면 많은 돈이 듭니다. 그 돈들이 어디서 난 것일까요? 아무리 숨겨도 그 돈 씀씀이로 그들의 과거 부정과 비리를 역추적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보조직에서는 그들을 ‘하마족’이라고 부릅니다. 도둑질한 돈으로 사우나의 물통에서 사는 족속을 말하는 거죠. 그런 하마족이 사람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녹음기 속에서 앙칼진 욕도 들리고 한 서린 소리도 들으셨죠? 세상이 언제 뒤집어지느냐는 말들입니다. 파출부들은 세상이 뒤집어지면 자기가 일을 나가던 아파트가 자기집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 한밤중에 택시기사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정보요원이 승객이 되어 불만을 조금만 유도해도 이 세상이 언제 확 뒤집어지느냐는 반응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뇌관만 터뜨리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인화성 짙은 사회입니다.”

정보기관에서 사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은 이런 기층민중의 심리를 꿰뚫고 있습니다. 남한 사회의 80%가 자기들 편이라고 계산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 기층민중이 들고 일어나면 남조선혁명은 순간에 달성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북은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방파제가 무너지고 소수정당으로라도 북한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면 선거로도 남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지금같이 빈부격차가 크고 도덕성이 약한 사회에서 그게 불가능한 소리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패망한 월남이 그랬습니다. 부정부패로 부자가 된 부유층은 서민들과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이 정부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일부 부유층은 너무 미국화되어 있기도 했죠. 미국이 발을 빼자마자 월남은 바로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도 그런 월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체제를 지키는 건 누가 하는 걸까요? 법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언론이 할까요? 그 소유주가 대개 재벌인 언론이 혁명을 막을 수 있을까요. 제도화된 군대나 경찰은요? 사회의 각 분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두뇌부에 전달하는 신경 같은 정보기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보기관에서 오래 일해온 저나 지금 처음 만나 뵌 엄 선생은 좌익이 이 사회를 점령하면 어떤 입장일까요? 부자도 아니고 나쁜 일도 한 적이 없으니까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저부터 말씀드리죠. 북한노동당에서는 남한 사람들을 51계급으로 분류해서 숙청할 계획이 서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저 같은 정보요원은 ‘치지도외 계급’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저 같은 사람은 따질 것도 없이 때려죽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엄 선생은 변호사이고, 이 조직의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을까요? 저희 조직은 몇 시간만 있어도 또 협조자만 돼도 그 이름이 비밀리에 기록됩니다. 그 기록이 적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루만 있었다고 용서하고 살려둘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엄 선생은 이미 죽음에 이르는 배를 함께 탄 것입니다. 그 다음 순위로 넘어가 봅니다. 군 장교나 경찰관, 검사나 판사 ,공무원도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6.25전쟁 시 인민재판에 회부된 판사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민사재판만 했고 그것도 공정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에 웃긴다는 야유가 터져 나왔었죠. 그리고 그 판사는 처형됐습니다. 6.25전쟁 시 2000명 가량의 공무원들이 북으로 끌려가 대동강변에서 학살당했습니다. 부자, 종교인, 우익의 가족들이 6.25전쟁 시 많이 죽었습니다. 지금 이 사회에는 좌파성향의 어설픈 지식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운명도 결국 마찬가지일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기회주의적 회색분자는 더 싫어합니다. 북은 남한의 좌익세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격시위를 주동하라고 지령을 내려보내고 그들의 시위장면을 북한 매체들을 통해 보도하죠. 북한주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남한의 좌익을 이용하는 겁니다. 결국 제가 말하려는 건 공허한 사상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숙청은 좌익들에게는 이념의 실현단계일지 모르지만 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반공은 이념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절박성에서 나온 겁니다.”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담장 안에 들어와 보기 시작한 후 그들의 모습은 의외로 조직적이고 어떤 방향성과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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