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①] 음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1987년 냉기 서린 바람이 부는 봄이었다. 점심시간 나는 서소문 뒷골목의 작은 스시집에서 안전기획부 요원인 대학 선배를 만나고 있었다. 그의 변신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법과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머리에 띠를 묶은 그가 수업중이던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에게 박정희 독재와 정보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시위에 동참하자고 열변을 토해냈다. 교수가 슬며시 자리를 피해 나갔다.
우리들의 인식에 중앙정보부는 독재를 떠받치고 정치와 음습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대의 악(惡)이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로 반정부적 발언을 금지시켰다. 그걸 위반하면 파멸이었다. 나는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바른말을 하면서 투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10년 후 정보기관의 간부로 변신한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에게 변신 배경을 확인하고 싶었다. 더 이상한 건 그가 스스로 정보기관으로 들어가 그 요원이 됐다는 사실이다.
내가 우회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정보기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건 보안이라 말해줄 수 없습니다.”
-추상적으로라도 말해줄 수 없는 겁니까?
“엄 변호사가 상상할 수 없는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할 거예요.”
나는 깜짝 놀랐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정보기관에서 일을 한다고 하다니. 그러면 민주화 투사였던 그는 무엇이었던가.
“왜 그런 겁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내가 작성하는 정보 보고서의 끝에는 항상 ‘조치 의견’이라는 나의 판단사항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이 관련부서에 통보되면 내가 생각한 대로 정책이 수정되거나 조치가 즉각 이루어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실제적인 힘을 느끼는 겁니다.”
그는 사람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 중앙정보부를 범죄집단으로 비난하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그렇다고 그가 권력욕이나 야망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순수성은 아직 색이 바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눈빛이 그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한달 후쯤 됐을까. 나는 이번에는 안전기획부의 해외파트에서 중견 간부로 있는 사람을 만났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그는 소령 시절부터 오랫동안 해외정보요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연히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친해졌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안전기획부가 뭘 하는 곳입니까?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보안이라 남에게 말하기가 곤란하네요.”
그는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남산의 지하실에서의 고문, 정치공작, 밀수, 암살 그런 일을 저지른 범죄집단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말이죠 과거에 있었던 조직 일부의 잘못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조직의 일에 비하면 빙산일각이죠. 실질을 말한다면 권력의 본질이나 국가경영의 실체를 보고 있죠.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검찰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검찰은 상대가 되지 않죠. 안전기획부가 기획하고 조정을 한다면 검찰은 그 하부 집행기관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정보기관에 대해 알고 싶은데 직접 들어갈 수 없을까요?
“안전기획부로 들어오려면 엄청난 고통을 주는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저도 육사 출신이지만 군부대의 유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혹독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낙하산도 타야 하고 서해의 섬에 가서 극기 침투훈련도 받습니다. 북의 대남공작원들이 받는 밀봉교육과 내용이나 강도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공부만 하시던 분이 그 과정을 통과하실 수 있겠어요?”
겁이 나지만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재미로 번지점프를 하기도 하고 고공에서 떨어지는 스카이다이버들도 있었다. 이미 30대를 넘어 체력상 감당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극기훈련과정을 통과하면 몸과 정신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정보기관에서 리쿠르트를 담당하는 요원을 소개해 달라고했다. 내가 만난 그는 후에 국정원장이 되어 북의 김정은이 기겁을 하게 만든 인물이다. 기형적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은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역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간간이 나의 직접적인 체험을 근거로 정보기관의 그늘 반대쪽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30여년 전 사실 문학적 호기심으로 그곳에 들어갔었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젊어서 노동현장을 체험하고 북에도 갔다 온 것처럼. 디지털 시대가 된 지금 아날로그 시대의 과거 중 일부를 글로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