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17] “12.12는 군사반란이었을까?”

12.12 주역들

당시 보안사 중령 이학봉의 증언

1979년 12월 12일 나는 수도군단 사령부의 법무장교였다. 박정희대통령 시해 이후 서울지역 군 내부의 분위기가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이 감정적으로도 극한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얘기가 장교들 사이에 돌았다. 군의 장교단이 양편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소리도 들려왔었다. 병역의무를 위해 군에 입대한 나는 그 어느 쪽이든 관심이 없었다.

이따금씩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헬기를 타고 수도군단 나의 사무실 바로 앞에 있는 헬기장에 내렸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청와대 주변을 둘러싸고 지키는 경호부대였지만 수도군단은 한강 이남과 경기도 일대를 지키는 부대였다. 예하의 33사단은 서울 외곽의 한 지역에 탱크와 포 그리고 병력이 집중된 부대였다.

33사단장은 내게 그런 부대의 위치 때문에 대통령이 특히 하사금도 많이 내리고 잘해줬다고 말해 주기도 했었다. 나는 그 부대의 법무참모로 1년 정도 복무한 적도 있었다. 나는 비상이 걸린 군단사령부에 묵으면서 계엄사무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2월 12일 그날 밤이었다. 군단 예하인 33사단의 101연대가 여의도의 방송국을 점령하러 들어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대원은 적과 구별하기 위해 전원 철모와 어깨에 하얀 띠를 두르라고 했다. 그게 반란군의 표시인 것 같았다. 공수부대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친다는 말이 들렸다. 저녁 무렵 이태원쪽의 참모 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많이 들리고 근처의 병원응급실이 아수라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날 육군본부 법무감실 당직장교였던 동기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상황이 어땠어? 우리 부대는 반란군 소속이라고 하더라구. 그쪽은 정부군인가?”

“마침 내가 당직장교였어. 막사 입구에 공수부대 하사관 몇 명이 왔어. 총을 겨누면서 나보고 ‘손드세요’ 하더라구. 그래서 손을 들었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법무감인 장군을 찾아달래. 그래서 법무감을 찾았더니 자기 장군 차 뒷좌석에 머리통을 박고 도망친 꿩 같이 숨어 있더라구.”

폭풍 중심에 있던 우리들은 위로 쓰나미가 지나가는 데도 둔감했었다. 또 다른 동기생 장교는 시간이 흐른 후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육본의 벙커를 지키던 대위가 있어. 그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대. 기관총을 벙커 앞에 놓고 공수부대 아이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하면서 밤새 벙커를 지켰대. 쏜다고 하니까 공수부대 아이들이 접근하지 않더라는거야. 그러다가 새벽 4시쯤 벙커 안을 들어가 보니까 개미 새끼 한마리 없더라는 거지. 그곳을 방어할 의미가 전혀 없는 거지. 그래서 돌아가 버렸대. 반란군이 이겼고 자기는 정부군으로 끝까지 저항한 셈이니까 앞으로 진급은 다 틀렸다고 걱정하더라구.”

하급장교였던 우리들에게 12.12 군사반란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 8년 후 나는 정보기관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파악해 정리하는 입장이 됐다. 군사반란을 주도한 가장 핵심에 있던 인물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심복이던 이학봉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학봉씨와 둘이서만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당시 상황을 얘기들을 기회가 있었다.

“12.12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내가 물었다. 군사반란인지 그들의 주장대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수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쏠 때 참모총장이 근처에 있었어요. 또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군본부 벙커까지 갔어요. 참모총장은 거기 모인 국무위원들한테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죠. 계엄사령관이 된 후에도 행동이 수상했죠.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법회의에 압력을 넣어 김재규를 옹호하고 구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어요. 게다가 김재규의 인맥이었던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3군사령관, 수도기계화사단장, 26사단장, 30사단장들을 모두 그대로 두고 있는 겁니다. 군법회의에서 김재규는 점점 민주화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자신의 범행이 유신통치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죠. 시민단체들은 김재규를 독재자를 제거한 영웅으로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 갔어요. 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에는 그 직만 충실히 수행하면 되는데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어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3김비토’ 발언이었죠. 저는 그런 참모총장의 행태를 보면서 잡아넣자고 전두환 사령관에게 건의했죠.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죽는 자리에 함께 있던 비서실장도 공범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걸 전두환 사령관이 허락하던가요? 군대조직에서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된 상관을 체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지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건 전두환 사령관이 그걸 허락했다는 거죠. 전두환 사령관은 당시 우리들보다 나이가 열살은 위였죠. 우리들의 그런 경거망동을 말려야 할 입장인데 그걸 허락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모총장을 떠받치고 있는 수도경비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 헌병감 등 서울 지역을 지키는 부대의 사령관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방해를 하면 안 되니까요. 저는 전두환 사령관에게 그 사람들도 모두 잡아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전두환 사령관이 그건 말렸어요. 차라리 거사 시각에 그 사람들을 술집이나 요정에 유인해 놓고 하면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그렇게 한 겁니다.”

“권력지형이 바뀌는 순간인데 그렇게 단순했단 말입니까?”

“세상에서는 우리가 군권을 잡고 정권을 잡으려는 치밀한 계획하에 벌인 일이라고 하는데 그건 자기들 잣대로 평가한 것이고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시점까지는 우리는 단순한 감정적 반발이 컸어요. 그리고 수사체계상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 결재가 있었으니까 사법적 체포행위지 군사반란이나 혁명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하여튼 그걸 계기로 군 내부에서 대립하고 갈등해 온 두 세력이 충돌한 거죠. 군의 장성들이 그 두 편 중 어느 쪽에 서느냐로 되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장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날 이후 블랙홀 같이 권력이 우리한테 빨려들어온 것 같아요. 모든 장군이나 기관장들이 우리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더라구요. 그 순간부터 솔직히 마음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김대중은 왜 구속하셨죠?”

“시위가 폭동상태를 넘어 내란상태로 갔어요. 엄연히 합법적인 최규하 정부가 있었어요. 유사시 군대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냥 재야에 정권을 넘길 수는 없죠. 그래서 내가 폭동의 주모자인 김대중을 구속하자고 건의 했었죠.”

그가 교묘하게 논리를 구성하거나 말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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