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보도] ‘박정희 살해’ 김재규에게 군검찰이 물었다. “당신이 정말 충신이었다면…”
[아시아엔=엄상익 변호사, 전 대한변협 공보이사] 먼 길을 좋은 손님이 찾아와 주었다. 젊은 시절 존경하던 선배 법무장교였다. 명문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자기 생각이 분명한 그의 강직한 성격을 나는 좋아했다. 군검사였던 그는 그 시절 우연히 태풍의 핵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시절 그가 있던 군사법정으로 나는 들어갔다.
1979년 12월 8일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12.12 군사반란이 있기 나흘 전이었다. 육군본부 군사법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비공개로 열리고 있었다.
“피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죠?” 군검사였던 그가 김재규에게 물었다.
“본인은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먼저 살해한 사실을 확인하겠습니다. 인정합니까?”
“저는 10월26일 저녁 7시 45분경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혁명을 했습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범행 장소에 유인했던데 범행 후 이용하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저는 그날 오후 4시40분경 궁정동 안가 2층 집무실에서 혁명 준비를 했습니다. 독일제 7연발 발터 권총을 금고에서 꺼내 시험해 보고 실탄 7발을 장전해서 서가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혁명 구상을 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부른 건 유인이 아니라 혁명 초부터 접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피고인 김재규는 사전에 궁정동 잔디밭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잠시 만났죠? 그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오늘 해치워 버린다고 했습니다.”
“비서실장이 불응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반대했다면 아마 저의 총에 맞았을 겁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선배 장교인 그는 군검사로 김재규의 행위를 직접 확인하고 기소했다. 그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직접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신문하고 조서를 받은 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
후일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일개 중령이 대통령을 조사한다고 해서 못마땅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군사법정 주변의 사회적 기류가 묘하게 부딪치면서 폭풍이 불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단은 그를 의인이라고 하면서 군사법정에서도 그를 장군님이라고 불렀다.
군검사인 선배는 피고인 김재규라고 했다가 재판거부라는 변호인들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김재규를 의인으로 칭송하는 시위가 일기도 했다. 군사법정에서 김재규는 갑자기 자신의 사선 변호인들을 모두 해임했다. 혁명의 순수성을 위해 혼자 재판을 받겠다고 했다.
재판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 며칠 후 계엄사령관의 공간에서 총격전이 일어나 참모총장이 체포됐고 공수부대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나는 후일 그날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전두환의 핵심참모인 이학봉씨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두환 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희 대통령 친위그룹 장교인 우리가 김재규를 힘들게 잡아 넣어 재판에 회부했죠. 그런데 재판이 질질 끌면서 김재규가 영웅으로 바뀌어가는 거예요. 역류되는 사회 분위기에 우리가 불안했어요. 저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죽일 때 부근에 있던 육군참모총장을 의심했어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끄는 것도 이상했구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지만 일단 그를 잡아야 한다고 전두환 사령관에게 건의했죠. 우리는 수사권을 가진 합수부니까 최고 지휘권을 가진 대통령의 결재만 얻으면 반란이 아니고 합법적인 수사라고 생각한 거죠.”
결국 계엄사령관이 패배하고 김재규는 사형장으로 갔다. 김재규의 사형을 집행한 법무장교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에 염주를 쥐고 있는데 사람이 그렇게 떠는 걸 처음 봤어.”
김재규를 조사하고 기소했던 그는 물론 나도 이제 노인이 되어 묵호 바닷가에서 곰치국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바둑을 복기하듯 그때 상황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지나간 44년의 무게가 꽤 되는 것 같다.
사실은 하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가 법무장교 선배인 그에게 물었다.
“의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평생 김재규를 친동생같이 대하고 뒷받침해 줬어. 장군도 시켜주고 장관도 시켜주고 중정부장도 시켜줬어. 친형 같은 그런 사람을 김재규는 총으로 한번 쏜 것도 모자라 다시 확인 사살을 했어. 김재규와 둘이 있을 때 중국의 고사를 제시하면서 그의 비윤리성을 따졌지. 당신이 정말 충신이었다면 박정희 대통령 앞에 사직서와 권총을 올려놓고 자유민주주의로 가자고 간언을 해야 맞는 게 아니었느냐고. 젊은 날 내 생각이 그래서 물어봤던 거야. 김재규가 내 말을 듣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구. 정보를 독점하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당시 상황을 제일 잘 알았다면 나는 대통령을 죽이기보다는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조서에는 올리지 않고 사적으로 주고 받았던 말이야. 합수부에서는 얻어맞기도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나는 법무장교니까 정중하게 대해줬지. 그가 의인이었을까?”
“민주주의가 한 단계 앞으로 간 건 맞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김재규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반사적 이익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이 다가온 거지 김재규가 혁명으로 그렇게 만든 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법정에서 그렇게 논박을 했지. 당시로서는 내가 밀리는 상황이었어.”
“김재규는 죽음을 예상하고 있던가요?”
“그때 법정에서 보면 김재규는 계엄사령관이 된 육군참모총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어. 자기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내 느낌이었어. 나는 그가 실패한 혁명을 재판과정을 통해 영웅이 되려고 한다고 반박했던 게 생각 나.”
“당시 누구보다도 김재규를 직접 많이 대면하고 말을 했는데 김재규의 장점이라면 어떤 것이었어요?”
“절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느꼈어.”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도 한다. 철학자 헤겔은 “권력자가 두드려 맞고 부서지는 과정이 역사의 발전”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우리가 있던 군사법정도 그런 역사의 한 장면이었을까.